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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7 -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초계군수(草溪郡守)로 부임하여 의병장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등과 함께 낙동강 오른편으로 현재 지 리산 인근지역을 포함한 강우지역(江右地域) 보전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8대조 매헌(梅軒) 수강(壽岡)은 학덕(學德)이 출중(出衆)하므로 사림(士林)들이 추중 (推重)하여 매림서원(梅林書院)을 세워 향사(享祀)하는 등 진충보국(盡忠報國 ) 과 시례지가(詩禮之家)의 유풍(遺風)을 지키면서 400여년간 살아온 명망(名望 ) 있는 재지사족(在地士族)이었다. 이러한 가문을 배경으로 생장(生長)한 그는 을 사조약(乙巳條約)과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인한 망국(亡國)의 설움에 비분강개 (悲憤慷慨)하면서 구국방략(救國方略)을 궁구(窮究)하던 중 스승인 임제(臨齊 ) 서찬규(徐贊奎) 문하에서 동문수학(同門受學)하였던 서건수(徐建洙)와 함께 파 리장서(巴里長書) 137명의 서명자중 21번째로 서명하여 조국독립(祖國獨立)의 당위성(當爲性)을 세계만방(世界萬邦)에 알리는데 적극 가담하였다. 지역인사 중 최초로 서명하여 지역 유림 5명의 서명(署名)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년 4 월경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모진 옥고(獄苦)를 겪었 으나 1919년 6월 9일 대구지방법원 판결에 의하여 기소유예(起訴猶豫)로 석방 되었다. 그 후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고령향교의 직원(直員 : 현재 전교)을 맡아 향풍교화(鄕風敎化)와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고취(鼓吹)하는데 진췌(盡悴 ) 하였다. 1942년 압록강 상류 북쪽 조선인 거주 지역인 서간도(西間島)로 망명 (亡命)하여 2년동안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하다가 수토병(水土病)으로 귀국(貴 國)하여 매림서원(梅林書院)을 중심으로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다가 광복(光復)을 맞이하여 좌우대립의 혼란기에도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면서 금도(襟度)를 지켰 다. 정남택(鄭南澤), 곽태진(郭泰珍) 등 지역 정객(政客)들의 자문(諮問)에 응하 고 탁견(卓見)을 제시하였으며 ‘강세계(講世契)’를 만들어 혼란기(混亂期)의 도 덕(道德)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전원생활(田園生 活)을 누리다가 1951년 신묘년(辛卯年) 2월 24일 향년 69세로 졸(卒)하셨다 . 묘는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구리곡 간좌(艮坐)이다, 정부에서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6년 8월 15일 건국포장(建國襃章)이 추서(追敍)하였 다. 2005년 9월 24일 애국지사(愛國志士) 몽와(夢窩) 곽선생(郭先生) 추모비(追 慕碑) 건립위원회(建立委員會)에서는 고귀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을 길이 후세 에 귀감(龜鑑)으로 삼고자 추모비(追慕碑)를 세웠으며 비문(碑文)은 문학박사 조동걸(趙東杰)이 근찬(謹撰)하고 진성후인(眞城後人) 이원흡(李源潝)이 근서(謹 書)하였다. 배위는 영산신씨(靈山辛氏) 기식(基植)의 딸이다. 참고문헌 : 애국지사 몽와 곽선생 추모비문, 독립유공자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