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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4 - ●최열부(崔烈婦)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은 경주인(慶州人) 최현대(崔顯大)의 딸이며 성산인(星山人) 사인(士人) 전신후(全愼垕)의 처이다.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시 집온 지 오래지 않아 남편이 학질(瘧疾)에 걸려 영조 33년(1757년) 3월 3일 향년 28세로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다. 남편의 상(喪)을 당해서 주야로 통곡하 여 애훼(哀毁)함이 지나쳤으며 상례(喪禮)에 맞게 정리(情理)와 예의(禮儀)로써 장사(葬事)하였다. 상중(喪中)에는 빗질과 목욕도 하지 않았으며 철마다 새옷을 지어 남편의 묘소에 올린 뒤 불 태우고 3년복을 마친 후에 담제일(禫祭日)인 영조 35년(1759년) 3월 3일 담제(禫祭)를 마치고 조용히 방에 들어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조카 성원(性元)을 거두어 후사(後嗣)로 세웠으며 강양(江 陽) 이직현(李直鉉)이 효열부최씨전(孝烈婦崔氏傳)을 삼가 기록하였다. 온 고을 에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정절(貞節)을 기려 열부(烈婦)로 칭송하였다. 참고문헌 : 동국여지삼강록, 영남여지 고령편(1894년), 성산전씨 세보 ●하열부(河烈婦) 진사(進士) 진양인(晋陽人) 하서우(河瑞于)의 딸로 선비 함안인(咸安人) 조정 필(趙廷弼)의 처(妻)이다. 조선 인조 10년(1632년)에 태어나 18세 되던 해에 함안조씨(咸安趙氏) 문중으로 시집와서 2년 후에 남편이 죽자 삼년상(三年喪 ) 를 지내고 또 시아버지 상을 당해 삼년상을 마치고 독약을 먹고 자결(自決)하 였다. 지방 사림(士林)들이 그 정절(貞節)을 기리기 위해 조정(朝廷)에 상소(上 疏)하여 영조 34년(1758년) 4월 예조(禮曹)에서 정려(旌閭)를 내렸으며 정려각 (旌閭閣)은 고령군 성산면 오곡리(午谷里) 산112번지 오실마을 못미쳐 오른쪽 도로변에 세워져 있으며 정려판(旌閭板)에는 ‘열부학생조정필지처진주하씨지려 (烈婦學生趙廷弼之妻晋州河氏之閭)’라고 적혀 있고 정려각(旌閭閣) 입구에 ‘열 부진주하씨열행약기(烈婦晋州河氏烈行略記)’라고 적은 작은 비(碑)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 영남여지 고령편(1894년), 고령문화사대계2 사상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