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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2 - 을 이어왔다. 하지만 이제 너희들에게 집안일을 맡기게 되었으니 다시 무슨 여 한이 있겠느냐”라는 말을 마치곤 남편의 장례날을 택하여 자진(自盡)하였으니 명종 14년(1559년) 12월 19일이었다. 그 후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명종 19년(1564년)에 명종이 왕명(王命)으로 ‘정열부인(貞烈夫人)’이라는 정표 (旌表)가 적힌 정열첩(貞烈帖)을 내려 정려각(旌閭閣)을 세웠으나 임진난(壬辰 亂)의 병화(兵火)로 1592년 5월 소실(燒失)되고. 후손들이 고종 6년(1869년) 3 월 정려각(旌閭閣)을 중건(重建)하였으나 현재는 없고 고령군 대가야읍 지산리 25-3번지 황정산(黃鼎山) 묘소 아래 ‘창녕조씨정열비(昌寧曺氏貞烈碑)’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고령문화사대계2 사상편 ●조열부(趙烈婦)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대소헌(大笑軒) 함안인(咸安人) 조종도(趙宗道 ) 의 증손녀이며 통덕랑(通德郞) 징천(徵天)의 딸로 고령박씨(高靈朴氏) 통덕랑 (通德郞) 박사전(朴思田)의 처이다. 중병(重病)에 걸린 남편의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부인 조씨(趙氏)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남편을 소생(甦生)하게 하였다. 하지만 남편의 병세가 워낙 깊어 얼마 있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난 조씨는 남편의 뒤 를 따르기 위해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자진(自盡)하려 했다. 그러자 시어머니 는 만류(挽留)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아서 몸을 의지할 데가 없고, 죽어 서도 시신을 부탁할 데가 없다. 그러니 이리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 시어 머니의 말을 듣고서야 겨우 죽을 먹으며 몸을 추슬렀다. 그 후 조씨는 시어머 니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30여 년을 하루같이 봉양하였다. 시어머니의 장례 또 한 남편의 장례와 같은 정성으로 치렀다. 숙종 43년(1717년) 10월 5일에 세상 을 하직하니 향년 77세이었다. 경종(景宗) 대에 효열(孝烈)로 정려복호(旌閭復 戶)되고 공인(恭人)을 숙인(淑人)으로 증자(增資)하는 은전(恩典)이 내려 졌다. 참고문헌 : 고령군의 비(碑) 하(1999년), 영남여지 고령편(1894년) ●정열부(鄭烈婦) 명문세가(名門世家) 팔계인(八溪人) 정진중(鄭鎭中)의 딸이며 양녕대군(讓寧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