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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1 - 가난하여도 부유한 집보다 배나 되게 하였다. 몸가짐과 조행(操行)이 온화(溫 和)하며 공손한 정성은 부모님도 칭찬하였으며 친척간의 돈독한 친목의 정은 친족이 모두 감복하였고 순수하고 온화한 기품(氣稟)은 향리(鄕里)가 칭송하였 다. 남펀이 난치병(難治病)으로 오래 고생하다가 사경(死境)에 이르자 하늘에 빌고 손가락을 짤라 피를 입에 드리우니 효험(效驗)이 있어 수 개월 더 연명 (延命)하다가 결국 운명(殞命)하자 3년상을 마친 후 묘소 옆에서 목을 매어 죽 으니 모든 사람들이 효열부(孝烈婦)라 칭송(稱頌)하였다. 한 사람의 몸으로 두 가지 어려운 일을 겸해 행하였으니 이어찌 세상에 드문 절개(節槪)있는 행실 (行實)이 아니겠는가? 장계(狀啓)를 나라에 올리니 영조 34년(1758년) 4월 예 조(禮曹)에서 정려(旌閭)를 명(命)하였다. 정려각(旌閭閣)은 고령군 성산면 오곡 리(午谷里) 산112번지 오실마을 못미쳐 오른쪽 도로변에 세워져 있으며 정려 판(旌閭板)에는 ‘효부학생조상벽지처나주임씨지려(孝婦學生趙相璧之妻羅州林氏 之閭)’라고 적혀 있고 정려각(旌閭閣) 입구에 ‘효열부나주임씨효열약기(孝烈婦羅州林氏孝 烈略記)’라고 적은 작은 비(碑)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 고령군의 비(碑) 하(1999년), 고령문화사대계2 사상편 ●조열부(曺烈婦)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창녕인(昌寧人) 언형(彦亨)의 딸이며 남명 (南冥) 조식(曹植)의 여동생으로서 산림처사(山林處士) 진양정씨(晋陽鄭氏) 월 담(月潭) 정사현(鄭師賢)의 아내이다. 중종 1년(1506년)에 누대(累代)에 걸쳐 문인(文人)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천성(天性)이 청아(淸雅)했 으며 조행(操行)을 독실하게 닦아 진양정씨 집안으로 출가하여 시부모와 남편 을 지성껏 모시었다. 불행하게도 남편이 명종 15년(1555년) 12월 18일 향년 48세에 돌아가시자 어린자녀를 양육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장례 때는 예(禮 ) 를 다하여 치르고 남명(南冥)과 상의하여 부귀(富貴)와 명예(名譽)보다 자손의 안녕(安寧)을 도모하는 곳에 장지(葬地)를 정하였다. 새벽 일찍 일어나 밤늦게 까지 분향(焚香)을 하며 애통(哀痛)해 하였고 춘하추동(春夏秋冬) 새옷을 만들 어 부군의 묘소에 올린 뒤 불태워서 3년간 지성껏 조상(弔喪)하였다. 이 때 부 인은 목욕은 물론 머리도 빗지 않고 3년간 지냈으며 냄새가 나는 채소를 먹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식들을 불러 놓고 “나는 언제나 너희 아버지를 뒤따 르고자 하였으나 너희들이 어려서 차마 그러지 못하고 지금까지 구차한 목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