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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0 - 동안 병석에 누워있어 병을 구하기 위하여 하늘에 기도를 드렸으나 세상을 뜨 고 말았다. 부인이 칼을 품고 죽으려 하자 만류하여 뜻릏 이루지 못하였으며 첫 보름 제사에 술을 마시고 남몰래 남편의 빈소에 들어가 결혼 때 사용하였 던 폐백(幣帛) 상자의 끈으로 목을 매어 자결(自決)하니 이 사실이 영읍(營邑 ) 에 알려져 포상을 하였다. 참고문헌 : 영남여지 고령편(1894년), 고령의 충효의열록(2016년) ●오열부(吳烈婦) 고창인(高敞人) 참의(參議) 오상옥(吳相玉)의 딸이며 파평인(坡平人) 윤학식(尹 學植)의 아내이다. 나이 17세에 시집와서 겨우 7일 만에 남편이 죽으니 남편 을 따라 죽기로 결심하자 시부모님께서 울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따라 죽으면 우리 두 늙은이는 장차 누구에게 의탁하겠느냐”라고 하셨다. 혼절(昏 絶) 중에 생각을 누르고 다시 생각하여 처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상례(喪 禮)와 장례(葬禮)를 한결같이 예(禮)를 따랐으며 분수를 지켜서 행동하며 절개 (節槪)지키기를 더욱 굳게 하였다. 효도하여 시부모를 받들며 양자(養子)를 얻 어 후사(後嗣)를 이으니 고을에서 여러번 포상(褒賞)을 주었다. 이러한 일이 오 륜행실록(五倫行實錄)에 실려 있다. 1930년 유두절(流頭節)에 진성(眞城) 이동 은(李東恩)이 찬한 ‘윤유인오효부추모비(尹孺人吳孝婦追慕碑)’가 고령군 성산면 상용리에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 삼강록(1868년), 오륜행실록(1797년) ●임열부(林烈婦) 현감(縣監)을 지낸 나주인(羅州人) 임중수(林重秀)의 딸이며, 사인(士人) 함안 인(咸安人) 조상벽(趙相璧)의 아내이다. 나주임씨(羅州林氏)는 조선 인조 15년 (1637년)에 법도(法度)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시집을 와 미덕(美德)과 올바른 행실(行實)을 겸비(兼備)하여 시부모를 섬기는 효도를 지극히 하여 며 느리의 도리를 행함에 정성(精誠)과 존경(尊敬)을 다하였다. 아침저녁의 문후 (問候)도 정성껏 하고 나아가고 물러감도 법도에 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 추위 와 더위의 계절에 의복의 구비는 반드시 신체에 적합한지를 살펴 올렸으며 청 하지 않음에도 드리는 음식은 반드시 구미(口味)에 맞게 올렸으니 비록 살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