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page

- 279 - (李基魯)는 「효행전(孝行傳)」을 지어 그녀의 행적을 널리 알렸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이열부(李烈婦) 김해인(金海人) 김용도(金容道)에게 출가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시부모님 을 봉양(奉養)하고 남편을 정성으로 모셨으나 불행하게도 남편이 일찍 죽어 가 정이 갑자기 몰락하게 되었다. 그도 남편의 뒤를 따르려고 하였으나 홀시아버 지와 어린 남매 때문에 부득이 슬픔을 억제하였다. 남매는 앞에 걸리고 시아버 지는 등에 업고 날품팔이 등 갖은 고생을 다하다 시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3년상의 예를 다하였다. 이후 어린 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다. 1936년 김해김씨 (金海金氏) 문중(門中)에서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효열행(孝烈行)을 기리기 위 해서 고령군 쌍림면 안화리 263번지 안화골에서 안림장터로 가는 도로변에 ‘전주이씨(全州李氏) 효열비(孝烈碑)’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고령군의 비(碑) 하(1999년), 고령문화사대계2 사상편 ●이열부(李烈婦) 밀양인(密陽人) 박병태(朴炳兌)의 아내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집이 몹시 가난 하여 스스로 자급(自給)할 수가 없고 남편이 우연히 악질(惡疾)에 걸려 문밖에 나가지 못한지 3년이 되었다. 전주이씨(全州李氏)가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 는 바느질을 하며 겨우 연명(延命)하였다. 또 나물과 과일을 길가에서 팔아 조 금 남는 돈으로 동서(東西)로 다니면 좋다는 약을 물어 구해 드리고 하늘에 기 도하여 길이 몸을 대신하기를 맹세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6∼7년 동안이나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아 남편의 병이 마침내 완쾌(完快)되었다. 이웃과 마을 에서 감탄하여 칭찬하고 관부(官府)에 표장(表獎)을 올렸다. 참고문헌 : 삼강록(1868년), 고령의 충효의열록(2016년) ●오열부(吳烈婦) 선비 양천인(陽川人) 허백(許栢)의 처이다. 남편이 난치병(難治病)으로 수개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