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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8 - ●이열부(李烈婦) 여주인(驪州人) 참봉(參奉) 이춘령(李春齡)의 딸이며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 臣)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를 지낸 함안인(咸安人) 조평(趙平 ) 의 아내이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그 당시 24세 이었던 조평(趙平)은 음력 6월 양친(兩親)과 부인 여주이씨(驪州李氏)를 이끌고 함안(咸安) 두곡촌(杜谷村)을 떠나 서쪽으로 피난을 하던 중 솥바위가 있는 정 암진(鼎巖津)에 이렀는데 추격하는 왜적은 점점 가까이 오고 나루터에는 노를 젓는 배가 없어 4명 모두가 목숨이 곧 끊어질 수도 있는 명재경각(命在頃刻)의 처지에 있었다. 부인은 눈물을 머금고 남편에게 강을 건널 것을 재촉하였다. “이 나루가 비록 넓다고 하나 당신의 용맹(勇猛)이라면 충분히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당신께서 급히 강물을 건너서 부자, 부부간 같은 날 죽 는 것을 면하소서” 라고 말하고는 곧 흐르는 강물 한가운데로 몸을 던졌다.남 편이 양쪽 손에 시부모(媤父母)만 모시고 안전하게 강물을 건너는 것을 배려 (配慮)하고 부인께서 도강(渡江)에 부담이 되는 것을 피하고 왜적으로부터 정 절(貞節)을 지키기 위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강물에 투신(投身)하였 다. 여주이씨(驪州李氏) 부인의 갸륵한 효열(孝烈)을 생각하고 울면서 읊은 조 평(趙平)의 칠언시(七言詩)가 유명한 ‘도정암진(渡鼎巖津)’이다. 시신(屍身)을 찾지 못하여 초혼장(招魂葬)으로 장례(葬禮)를 치루었으며 전란중(戰亂中)이라 여주이씨(驪州李氏) 부인의 높은 절개(節槪)과 열행(烈行)을 표창하기 위하여 정려(旌閭)를 세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효열(孝烈)은 임실군지(任實郡誌) 등지 에 수록되어 충효교육(忠孝敎育)의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 운학선생문집부록권1(雲壑先生文集附錄卷一) 조평(趙平) 행장(行狀 ) ●이열부(李烈婦) 진성인(眞城人) 이재롱(李齋洪)의 딸이며 성산인(星山人) 배우현(裵瑀鉉)의 아 내이다. 남편이 병으로 앓아눕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며, 남편의 생명이 위급에 처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소생(甦生)케 하였다. 남편이 세 상을 떠나자 그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으며, 또한 스스 로 머리카락을 잘라 정절(貞節)을 지키겠다는 표시를 하였다. 이씨의 열행(烈 行)이 널리 알려지자 관청에서 이를 알고 표창하였다. 또한 전의(全義) 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