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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7 - 재가 일어나 집과 사당이 불에 탈 때 70세 고령(高齡)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 당(祠堂)에 들어가 시부모님과 남편의 신주를 모셔 나오다가 순절(殉節)하였지 만 다행히 그 신주는 불에 타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인조 11년(1633년)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913년 성산배씨(星山裵氏) 문중(門中 ) 에서 고령군 쌍림면 하거리 산 23번지에 성산이씨(星山李氏)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하여 ‘성산이씨(星山李氏) 효열비각(孝烈碑閣)’을 세웠다. 참고문헌 : 영남여지 고령편(1894년),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이열부(李烈婦) 현풍인(玄風人) 곽희수(郭希壽)의 아내인 성산이씨(星山李氏)이다. 시아버지가 결혼 초부터 병으로 앓아눕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 이 일어나 남편은 전력부위 수문장(展力副尉 水門將)으로 근무하기 위해 한양 (漢陽)으로 떠났다. 이 사실을 안 왜구가 남편의 군사(軍事) 기밀(機密)을 탐지 (探知)하기 위해 약장수를 가장하고 성산이씨에게 접근하자 이를 간파하고 크 게 꾸짖어 물리쳤다. 일이 여의치 않은 왜구가 성산이씨의 손목을 잡고 욕을 보이려 하자, 그는 더러운 자에게 손을 잡혔다면서 식칼로 자신의 손목을 자르 고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이 효열(孝烈)의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조 39년 (1763년)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덕곡면 원송리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가 1885년 경남 합천군 가야면으로 이건(移建)하였다가 다시 1977년 덕곡면 반성 2리 338-1번지로 ‘성산이씨(星山李氏) 효열각(孝烈閣)’을 이건(移建)하였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고령문화사대계2 사상편 ●이열부(李烈婦) 여주인(驪州人) 양무원종2등공신(楊武原從二等功臣) 이선태(李宣泰)의 현손녀 (玄孫女)로 이주민(李柱民)의 딸이며 초계인(草溪人) 정천준(鄭天駿)의 아내이 다. 남편의 병이 오래되고 깊어 처방에 따라 지은 약이 모두 효험이 없자 넓적 다리의 살을 떼어내어 남편에게 바침으로 인하여 기이(奇異)하게 효험(效驗)이 있어 병이 나았다. 참고문헌 : 연조귀감(掾曹龜鑑) 관감록(觀感錄), 고령의 충효의열록(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