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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5 - 만에 남편이 병사(病死)하자 시부모 앞에서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조금도 슬퍼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다가 남편의 3년상을 마친 후에 남편의 허리띠로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의 죽은 모습은 산 사람처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선녀(仙女)같은 자태(姿態)였다고 한다 . 1901년 양천최씨(陽川崔氏) 문중(門中)에서 고령박씨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고령군 쌍림면 하거리 산 17번지 학동마을입구에 고령박씨(高靈朴氏) 열녀문 (烈女門)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박열부(朴烈婦) 현풍인(玄風人) 곽무성(郭茂成)의 아내인 고령박씨(高靈朴氏)이다. 남편이 병 에 걸려 임종(臨終)이 임박(臨迫)하자 손가락을 잘라 연명(延命)하게 3년을 복 상(服喪)하였다. 이 일이 널리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를 세워 그를 기렸다 참고문헌 : 영남여지 고령편(1894년),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배열부(裵烈婦) 성산인(星山人) 승지(承旨) 배정휘(裵正徽)의 손녀이며 한산인(韓山人) 이의복 (李義福)의 아내이다. 성산배씨(星山裵氏)는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장례를 치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옷을 갈아입지 않고 엎드려 자리를 뜨지 않았으며, 머리를 감거나 빗지도 않았다. 또한 밥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남과 말도 하지 않았고 하늘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며 남편의 3년상을 치르고 난 뒤 시아버지가 자신의 개가(改嫁 ) 를 논의하기 위해 친정으로 간 사실을 알고는 조용히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정 절(貞節)을 지켰다. 사림(士林)에서 정절(貞節)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旌閭)를 세웠다. 열녀(烈女) 성산배씨(星山裵氏)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하여 한산이 씨(韓山李氏) 문중(門中)에서 고령군 쌍림면 신곡1리에 ‘열녀학생한산이의복처 유인성산배씨지비(烈女學生韓山李義福妻孺人星山裵氏之碑)’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영남여지 고령편(1894년),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