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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2 - 내이다. 본래부터 정조(貞操)가 있었는데 어떤 강하고 포악(暴惡)한 사람이 그 몸을 더럽히고 욕되게 하려고 하니 분하여 먹지 않고 죽었다. 고을에서 모두 칭송하였다. 참고문헌 : 삼강록(1868년), 고령의 충효의열록(2016년) ●김열부(金烈婦) 이영용(李永龍)의 아내 김씨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부가 함께 산중(山中 ) 으로 피난하던 도중 남편이 왜적에게 살해당하자 분기(憤氣)하여 자살하였다 . 광해군 대에 정려(旌閭)를 받았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김열부(金烈婦) 김해인(金海人) 김재협(金載協)의 딸이며 창녕인(昌寧人) 조범환(曺範煥)의 아 내로 시집을 온지 얼마 되지 않은 21세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김 씨는 손수 남편의 묘소 옆에 거처를 짓고 신주(神主)를 받들었다. 김해김씨(金 海金氏)가 시묘(侍墓)를 하는 동안 길쌈을 하여 남편 무덤의 모든 석물(石物)을 마련하였다. 그 후에도 김씨는 시묘살이를 그치지 않고 평생토록 이어가니 향 리(鄕里)에서 추중(推重)하였다.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이 시묘각기(侍墓閣 記)를 찬(撰)하였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김열부(金烈婦) 기재(棄齋) 김수옹(金守雍)의 후예로 경주인(慶州人) 김호철(金琥哲)의 딸이며 여주인(驪州人) 이병무(李炳武)의 아내이다. 가난한 집안을 꾸려나가면서 우연 히 당달봉사가 된 남편을 위하여 부인이 밤마다 정화수(井華水)를 떠다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