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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9 - 자기 방에 몰래 들어가서 가만히 그 좌편 다리 살을 끊어 닭고기 산적(散炙)과 섞어서 드리고 또 밤에 그 우편 다리 살을 끊어 개고기 즙(汁)과 함께 조리(調 理)하여 먹게 하니 시부(媤父)의 병이 곧 쾌차(快差)하였다. 며칠 후에 집안사 람이 알고 깜짝 놀라 모여서 보니 칼흔적에 피가 어렸는데 동여매기만 하고 약은 쓰지 아니하였으나 스스로 나았으니 당시에 오씨의 연세가 이십사 세시 다. 효도는 진실로 천성에서 나와 부인의 모범에 해자가 없음을 여기에서 가히 알 것이다. 이에 군과 도에 선비들이 이미 다 감탄하고 본받으며 또 장차 천양 (闡揚)하려고 연명(聯名)으로 글을 만들어 부와 군에 분주하게 다닌 것은 다 계산할 수 없고 차례로 암행어사(暗行御史) 정숙헌(鄭肅獻) 만석(晩錫)에게 호 소하니 이르기를 들으니 높은 행실이 지극히 가상(嘉尙)하여 표창할만하므로 더욱 공의(公議)를 기다릴 것이니 원장(原狀)을 우선 대략 기록하라 하였고 방 백(方伯 : 지금 도지사)인 이동련(李東蓮) 헌영에 들어가니 이르기를 이는 공의 를 더욱 더하고 실제를 기록하여 더욱 오래까지 빛나도록 할 것이라 하였고 예조판서(禮曹判書) 김문정공(金文貞公) 정집(鼎集)께서는 이르기를 이와 같이 특이한 행실을 들으니 지극히 아름답고 감탄되므로 식년(式年 : 삼 년마다 과 거 및 표상을 시행하는 해)이 멀지 아니하니 도에서 보고하기를 기다려 참작한 다고 하였다. 그 후로 급복(給復 : 자손에게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는 것)은 되었으나 정문(旌門)에 미치지 못함은 나의 백부님 휘 경환(璟煥)께서 시종 그 일을 추진하다가 불행히 일찍 별세하신 연고이니 슬픈 것을 어찌 말하리오. 예 (禮)에 세 가지 부끄러움이 있으니 선조가 아름다움이 없는데 칭찬하면 이는 속이는 것이요 선(善)이 있는데 알지 못하면 밝지 못함이요 알면서 전하지 아 니하면 인(仁)하지 못한 것이니 돌아보건대 부끄러운 것은 오씨의 후손된 자가 자못 인(仁)하지 못하고 밝지 못함이 심하도다. 그러므로 불초한 상(塽)이 대략 우편과 같이 지어 군자가 입언(立言 : 의견을 세상에 발표하는 것)함을 얻어 오래토록 전하여 세상에 침체되지 아니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당시의 암행어사(暗行御史) 정만석(鄭晩錫)과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정집(金鼎 集)이 오씨(吳氏)의 효행(孝行)에 대하여 찬탄해 마지않으며 조세(租稅)와 부역 (賦役)을 면제해주도록 하였다. 1930년 효부(孝婦) 해주오씨(海州吳氏)의 효행 (孝行)을 기리기 위해 창녕조씨(昌寧曺氏) 문중(門中)에서 비각인 ‘해주오씨 (海 州吳氏) 숭효각(崇孝閣)’을 건립하게 되었다.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이러한 효 행 사실은 『성주지(星州誌)』에 실렸으며,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이 ‘효부해 주오씨지비(孝婦海州吳氏之碑)’의 비문을 쓰고, 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이 「효부전(孝婦傳)」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