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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8 - ●민효부(閔孝婦) 아버지는 여흥인(驪興人) 첨지(僉知) 민국창(閔國昌)의 딸이며, 남편은 문헌공 (文憲公) 기대승(奇大升)의 6세손인 행주인(幸州人) 기원택(奇元澤)의 아내이다 . 시아버지께서 눈이 멀고 발에 종기가 나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움직일 때는 부축하여 반드시 곁에서 모시며 대소변을 몸소 받아내어 자녀에게 대신 하게 하지 않았다. 만약 옷과 이불이 더러워지면 비록 한 겨울에도 얼음을 깨 어서 빨았고 이불과 자리에 결코 악취가나지 않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20여 년에 우연히 병이 들어 죽음에 이르렀다. 동서(同壻) 김씨를 불러 경계하 고 말하기를“내가 불초(不肖)하고 죄가 커서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고 죽으니 그대가 나의 뜻을 대신하여 잘 섬기라”고 하였다. 김씨 또한 효도하니 고을에 서 칭송하였다. 참고문헌 : 삼강록(1868년), 고령의 충효의열록(2016년) ●오효부(吳孝婦) 사인(士人) 해주오씨(海州吳氏) 오응규(吳應奎)의 딸이며, 창녕인(昌寧人) 조규 승(曺奎承)의 아내이다. 증손 봉강(鳳岡) 조상(曺塽)이 봉강(鳳岡) 문집(文集 ) 귄지삼(卷之三)에 기록한 오씨(吳氏)의 효행(孝行) 사실(事實)을 인용하면 다음 과 같다. “ 나의 증조모님 오씨의 관향(貫鄕)은 해주(海州)이니 사인(士人) 응규(應奎)의 딸로 세상이 효부(孝婦)라 일컫는다. 응규(應奎)씨가 대구부(大邱府) 화현(花縣 : 현재의 달성군 화원읍지역)에 거주할 때 집이 심히 한미(寒微)하여 아들딸을 낳아 가르치지 못하였으나 부인께서는 성품이 온순하고 밝아 이같이 할 때로 부터 조금도 어버이 마음을 거스르지 아니하고 이에 기축년(己丑年 : 1829년 ) 봄에 우리 증조부에게 돌아오시니 증조부님의 휘는 규승(奎承)이시고 휘 석두 (錫斗)는 곧 그 시부(媤父)시다. 시부께서 마침 학질(瘧疾 : 속칭 초학)을 만나 여러 달 고생하시니 오씨께서 좌우에 나아가 봉양(奉養)함이 효도(孝道)하고 정성스럽고 게을리 하지 아니하며 대소변을 바가지와 항아리로 받아서 처리하 고 주야(晝夜)로 하늘에 빌면서 자신으로 대신하기를 원했으나 백 가지 방도 (方途)가 무효하여 정녕 별세(別世)할 것이라고 여겼다. 다음 해 십일월 이십일 에 오씨께서 나갔다가 인육(人肉)이 최고로 해당된다는 말을 듣고 이에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