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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7 - 를 살피는 것을 거르지 않고 베 짜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으며 맛있는 음식 을 갖추어 시부모님께 받들고 자기는 나물밥을 먹었다. 시부모님이 중지시키며 “너의 동서가 정성스럽게 봉양하는 것이 이미 충분한데 어찌 그리 하느냐”고 하시니 “저는 시부모님의 며느리가 되지 못하는가요”라고 하며 40여년을 하루 같이 하였다. 가문의 종족과 고을 사람들이 모두 효행에 감복하여 포상이 있었 다. 참고문헌 : 삼강록(1868년), 고령의 충효의열록(2016년) ●김효부(金孝婦) 경주인(慶州人) 김성희(金性熙)의 딸이며 행주인(幸州人) 기용걸(奇龍傑)의 아 내이다.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시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슬퍼하며 곡 (哭)하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살림이 빈곤한데도 술을 좋아하는 시아버지를 위 해 하루 세 잔씩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드렸으며, 조석을 받드는 데 밥과 반찬 을 정성을 다해 지어 올렸다. 그러다 중한 병에 걸려 수개월 앓아누워 있으면 서 소생(甦生)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들과 며느리를 불러 놓고, “끝 까지 아버님을 봉양하지 못한 죄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겠느냐? 너희들은 나 를 대신하여 아버님을 잘 모시도록 해라. 그리고 내 손수 지은 아버님의 수의 (壽衣)가 장롱(欌籠)에 있으니 아버님이 백세가 지난 후에 상을 당하거든 쓰도 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치와(痴窩) 김상응(金相應)이 효행록 (孝行錄)을 지었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나효부(羅孝婦) 수성인(壽城人) 나영수(羅永洙)의 딸이며 진양인(晋陽人) 강하영(姜厦永)의 아 내이다. 효성으로 홀시아버지를 받드는데 일찍이 흉년을 만나서도 솥 곁에 작 은 냄비를 걸어서 달리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드렸다. 뜻을 따르고 받들기를 어긋남이 없었고 늘어서도 쇠퇴하지 않았다. 고을과 이웃에서 그 부부의 쌍효 (雙孝)를 감탄하였다. 여러 번 포상이 있었고 관에서 쌀과 고기를 주었다. 참고문헌 : 삼강록(1868년), 고령의 충효의열록(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