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page

- 266 - 이가 없었다. 부인 은씨(殷氏) 또한 남편의 효행에 감복하여 지성으로 시어머 니를 모셨다. 시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는 몸이 상할 만큼 상례(常禮)를 뛰어넘 는 극진한 슬픔을 보였으며, 상중에 60여 일을 한 그릇의 죽(粥)으로 연명하였 으며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자 현종 10년(166 9 년) 정려문(旌閭門)을 세워 주었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⓶ 효부 ●공효부(孔孝婦) 사인(士人) 권해증(權海增)의 아내인 곡부공씨(曲阜孔氏)이다. 일찍부터 남편 을 여의고 시모(媤母)를 모시는데 시모가 돌림병으로 오래 고생했다. 곡부공씨 (曲阜孔氏)가 지성으로 간호를 하였으나 아들을 잃은 처량(凄凉)한 몸이라 두 눈이 어두워 앞을 보지 못하였다. 공씨(孔氏)가 사람의 침과 사람의 젖이 좋다 는 말에 매일 혀로 빨고 젖가슴으로 문지르기를 21년간이나 계속하니 그 정성 으로 시력(視力)이 회복되어 광명천지(光明天地)를 보고 30여년을 단란하게 살 다가 82세에 수(壽)를 다하니 고을 사람이 아름다운 효행을 감탄하였으며 여러 차례 영읍(營邑)에서 정표(旌表)하였다. 참고문헌 : 영남여지 고령편(1894년), 고령의 충효의열록(2016년) ●김효부(金孝婦) 김해인(金海人) 김상두(金尙斗)의 딸이며 달성인(達城人) 서석희(徐錫熙)의 아 내이다. 나이 17세에 시집와서 몇 해 되지 아니하여 남편의 병이 중(重)하여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게 하였으나 마침내 별세(別世)하였다. 시부모를 생각하 여 그다지슬퍼하지 않고 장례의 도구를 손수 점검하고 제사에 올리는 것을 예 (禮)와 같이하였다. 따로 분가(分家)하여 살면서 시부모님께 아침저녁으로 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