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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4 - 참고문헌 : 월담선생실기, 영남인물고(1798년), 고령대관(1959년) ●조성린(趙性麟)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자는 현서(玄瑞)이고 호는 소은(蘇隱)이다. 낙와(洛窩 ) 후식(厚植)의 아들로 철종 7년(1856년) 지금의 고령군 성산면 오곡리에서 태어 났다. 생육신인 어계(漁溪) 조여(趙旅)의 후예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효성 이 지극하여 부모의 말씀을 어긴 적이 없었다. 특히 그는 글읽기를 좋아하여 경주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두 번이나 장원(壯元)을 하였다. 어머니께서 학질 (瘧疾)을 앓으신지 해를 넘기게 되자 하늘에 기도하여 유검루(庾黔婁)처럼 대 신하기를 원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인육(人肉)이 가장 좋다”고 하자 허벅 지 살을 베어 약에 타서 드려 낫게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몹시 놀라 탄식하고 음식을 갗추어 올리니 그는 손사례를 치며 받아 드리지 않았다. 어버이가 돌아 가시자 애도(哀悼)하고 예(禮)를 다하였다. 효행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증직(贈職)되었으며 그 후 사림과 문중에서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고령군 성산면 오곡리 산 112번지 마을 어귀에 효자비(孝子碑)를 세웠다. 그리고 효자 각(孝子閣)을 짓고 전의(全義) 이기로(李基魯)가 묘비명을 지었다. 조성린(趙性 麟)의 효자각(孝子閣)과 진주하씨(晋州河氏)와 나주임씨(羅州林氏) 정려각(旌閭 閣)은 나란히 붙어 있다. 공의 묘소는 개진면 구곡2리 일명 봉골(鳳谷)에 있다 . 註) 유검루(庾黔婁):남제(南齊) 때 효자로서 그가 잔릉(棧陵)에서 현령(縣令)으 로 근무할 때, 아버지의 병환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으로 달려가니, 의원이 변 의 맛을 보아야 정확한 진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유검루가 주저 않고 손가락으로 변을 찍어 맛을 보니, 단 맛이 나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그의 아 버지는 이질을 앓고 심한 설사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이후로 매일 북극 성에 빌어 아버지의 쾌유를 빌었으나, 하늘의 소리가 이르길, 아비의 수명이 다했으나, 효심을 보아 한달만 수명을 연장케 해주겠다고 하였다. 하늘의 말대 로 그의 아버지는 한 달후에 죽었고, 유검루가 3년간 상을 치렀다. 이 때부터 변을 맛봄(嘗糞)이 지극한 효성을 뜻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삼강록(1872년),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