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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3 - 의인(全義人) 이공량(李公亮)의 아들로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재직중인 이준민 (李俊民)은 공의 처이질(妻姨姪 : 처조카)로서 이모부(姨母夫)인 공의 학행(學 行)을 흠모(欽慕)하여 인재(人材)를 가려서 쓰겠다는 뜻을 표시하자 남명선생의 출처대의(出處大義 : 관리에 나아감과 물러남의 명분)을 따라 공은 벼슬에 진 출할 뜻이 없어 이공(李公)의 문전(門前)에 발길을 끊었다. 44세인 1551년 월 담정(月潭亭)을 짓고 그 정자에 올라 일찍이 시를 읊어 가로되 “세상사(世上 事)는 거문고 석 자이고 먹고 사는 이치는 집 몇 칸이라 누가 참된 길을 알리 오 그믐 가을달이 쓸쓸하게 못에 비치누나”라고 하였다. 공은 이 시에 자서(自 書)를 하고 편액(扁額)을 만들어 달았으며 구암(龜巖) 이정(李禎), 한강(寒岡 ) 정구(寒岡) 등 모든 선생이 모두 이 시에 화답(和答)하여 칭찬했다. 48세인 1555년 12월18일 졸(卒)하셨다. 부음(訃音)이 남명 선생에게 알려지자 남명선 생께서 조곡(弔哭)하고 친히 묘자리를 잡아 황정산(黃鼎山) 어머니 묘소 아래 건좌(乾坐)에 장사를 지냈으며 애석하게 여겨 시를 짓기를 “어린 풀은 파릇파 릇 봄빛을 띠었는데 해마다 한 치씩 혼을 녹이는구나 ”라고 하였다. 숙종 3 7 년(1711년) 신묘년에 향촌의 인사들이 영연서원(靈淵書院)을 세우고 공을 배향 (配享)하였으며 1978년 3월 3일 후손이 월담정선생유적비(月潭鄭先生遺蹟碑 ) 를 세웠고 2004년 3월 월담정(月潭亭)의 원운(原韻) 시비(詩碑)를 건립하여 공 을 기렸다. 정열부인(貞烈夫人) 조씨(曺氏)는 월담공(月潭公)이 하세(下世)하자 부인께서 염습(殮襲)과 장제(葬祭)에 이르기까지 형식보다는 슬픔의 예를 다하 여 상을 치름에 하나같이 예법(禮法)을 준수하였고 여묘살이를 할 때에는 부인 은 남자와 다르게 노비를 거느리고 이른 새벽과 저녁에 묘소를 내왕하였다. 사 계절을 그치지 않고 계절별로 옷을 지어 매번 묘 앞에 태웠으며 3년복을 벗어 도 또한 더욱 애상(哀傷)하여 머리를 빗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았으며 맵거나 냄새가 나는채소 등을 먹지 않았다. 아침 저녁으로 성묘(省墓)하였고 남편의 3 년상 동안에 머리를 빗거나 목욕을 하지 않았고 냄새가 나는 채소를 먹지 않 았다. 제삿날이 돌아오자 식음을 전폐하고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명종 19년(1564년) 정열(貞烈)의 첩지(帖紙)가 내려졌고 이로 인하여 정려각(旌閭閣)을 지었으나 불행하게도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소실 되었으나 후손들이 1869년 3월 정려각(旌閭閣)을 중건(重建)하였다. 묘는 부군 의 묘소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2015년 고령군은 대가야 문화누리 공연장 뒤편에 월담지(月潭池)라는 조그만한 연못과 정자인 월담정(月潭亭)을 복원하 고 그 옆에 선비 사색(思索)의 길을 조성하여 산림처사(山林處士)와 출천효자 (出天孝子)로서 올곧은 삶을 살았던 공의 행적(行蹟)을 기리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