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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2 -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자는 이지(以之)이고 호는 경모재(敬慕齋)로 숙종 18년 (1692년)에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지낸 전극창(全 克昌)이다. 그는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33세가 되던 경종 3년(1723년) 부 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侍墓)를 하였고, 영조 4년(1728년)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막을 지켰다. 영조 10년(1734년) 국상(國喪)이 있자 지팡이를 짚고 산 에 올라 왕이 계신 북쪽을 바라보며 3일간 밤낮을 울부짖고, 선영이 있는 주 산(主山) 위에 대(臺)를 높이 쌓고 3년간 조석(朝夕)으로 분향(焚香)하고 곡(哭 ) 을 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과 나라에 대한 충성이 알려져 관찰사의 상신(上 申)으로 숙종 37년(1711년) 강릉참봉(康陵叅奉)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전지(田 地) 3결(結)에 대한 조세가 면제되는 복호(復戶)가 내려졌다. 묘소는 운수면 신 간동 동산(東山)에 있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정사현(鄭師賢) 본관은 진양(晋陽)이며 자는 희고(希古)이고 호는 월담(月潭)이다. 효행(孝行)으 로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중종 3년(150 8 년) 정덕(正德 : 명나라 연호) 무진년(戊辰年) 9월 13일에 아버지 린(麟)과 나 주박씨(羅州朴氏)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초휘(初諱)는 사현(思 玄)으로 하였으나 후에 사현(師賢)으로 개명(改名)하였다. 9세 이전에는 경전을 탐독(耽讀)하고 언행(言行)이 보통 아이와 달랐다. 9세인 1516년 부친상을 당 하여 몹시 슬퍼함에 뼈만 남을 정도로 야위어 자신(自身)의 생명(生命)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여묘 살이를 하면서 3년상을 마쳤는데 상례법도(喪禮法度 ) 에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효자로 칭송이 자자했다. 16세인 1523년 모친이 병이 들어 점차 위독해지자 시름이 깊어 마음을 안정하지 못하고 자기가 대신하여 죽기를 신령에게 기도하고 하늘에 축원하였으며 의원을 맞이하고 약 처방을 물을 때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어 마침내 병이 완쾌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공이 부모를 섬기는 효성이 독실한 것에 감복하고 하늘을 감동시킨 그 효를 칭찬해 마지 않았다. 22세인 1529년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그 소문을 듣고 누이를 공에게 시집보냈으니 곧 정열부인(貞烈夫人) 조씨(曺氏)로 승문원 (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언형(彦亨)의 딸이다. 그후 7살 위 처남(妻男)인 남 명(南冥) 선생의 문하(門下)에 드나들며 덕성(德性)을 교화(敎化)하고 훈육(訓 育)하며 제현(諸賢) 반열(班列)에 있는 분을 뒤쫓아 도의(道義)를 갈고 닦음으 로써 외형보다 내면을 중시하여 마침내 과거공부를 포기하였다. 둘째 동서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