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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9 - 본관은 광평(廣平)이며 자는 이일(而一)이고 호는 지비당(知非堂)이다. 어릴 때에 조부께서 병이 들어 위급할 때 잉어회를 드시고 싶어하니 목욕재계하고 울부짖으며 물가에 이르자 홀연히 한 자가 되는 잉어가 얼음위로 스스로 올라 왔다. 회를 하여 바치니 병이 곧장 완쾌(完快)되었다. 뒤에 아버지 병이 위중 한데 온갖 약의 효험이 없어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시게 함으로써 다시 회복 하니 온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효(孝)에 감화(感化)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말하 였으며 군과 도에 글을 올려 포창(襃彰)이 있었다. 참고문헌 : 삼강록(1872년) ●이천을(李天乙)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호는 졸헌(拙軒)이고 고려 공민왕 14년(1365년)에 태 어났다. 증조부는 고려 충렬왕 때에 여진을 토벌한 공로가 있어 금자광록대부 (金紫光祿大夫)와 동평장사(同平章事)란 벼슬에 올랐던 이헌(李憲)이며 조부는 충숙왕 때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평정(平定)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 낸 이언(李彦)이고 아버지는 고려말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항전(抗戰 ) 하다가 순사(殉死)한 충절(忠節)의 사표(師表)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 崇)이다. 공은 부모가 돌아가시자 묘소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모두 3년씩 6년 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의 호곡(號哭)이 애처러워 향린(鄕隣)을 감동시켰고 상례(喪禮)를 극진히 하여 하늘이 낸 효자(出天之孝)로 칭송을 받았고 경학(經 學)에 밝고 행실이 착한 선비(經明行修之士)로 추앙을 받았으며 망복(罔僕)의 고아(高雅)한 절개(節槪)를 지켰다. 그가 여묘살이를 하던 중 애훼(哀毁)함이 예(禮)에 지나쳐서 혼절(昏絶)하자 호랑이가 나타나서 꼬리로 쓰다듬어 의식을 회복시켰으며 험한 산길을 동행하고 여막을 호위하는 등 여묘살이를 도왔다 . 그가 별세한 후에도 호랑이는 초상(初喪)과 탈상(脫喪)때 꼭 밤에 문상(問喪)하 러 집에 왔으며 3년상이 지난 어느날 여묘살이를 하였던 곳에 피를 토하고 죽 어 있는 것을 아들 이춘미(李春美)가 발견하고 대밭등 둿편에 묻어 주었다. 그 후부터 그의 후손들은 제사 때 호랑이의 은혜를 잊지 않고 별도로 호랑이 제 사상을 차렸으나 임진왜란 이후부터 호랑이 제사도 끊겼다. 그러나 아직도 세 인(世人)들은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에 감동(感動)한 호랑이가 여묘살이 를 도왔던 안동장군 묘역 계단아래를 “의호지(義虎址 : 의로운 호랑이가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