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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8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고령기네스(2015년) ●이근수(李根壽)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가윤(可潤)이고 호는 죽함(竹檻)으로 동몽교관(童 蒙敎官)을 지냈다. 아버지 이형로(李亨魯)와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 서 순조 32년(1832년) 장남으로 지금의 고령군 덕곡면 예리에서 태어났다. 조 선 세종 때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을 지낸 송오(松塢) 이사징(李士澄)의 1 8 세손이다.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부모를 모시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이웃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아버지가 방안의 냉기(冷氣)와 습기(濕氣)로 말미암아 몸에 마비(痲痺)가 일어나는 ‘풍비(風痺)’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고, 매일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여 소생(甦生)하게 하였다. 하지 만 병의 후유증(後遺症)으로 아버지의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한시도 곁을 떠 나지 않고 수발을 들었다. 이러한 와중에 뜻밖에도 자신의 아들이 중병(重病 ) 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곁을 비울 수 없다며 아들의 장례에 가지 않았다. 또한 이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되면 상심(傷心)할 것을 염려하여 집안사람들에게는 곡(哭)소리를 내지 말라고 분부하였다. 아버지를 간호하는 도중에 어머니가 갑작스런 병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하게 하였으며, 아버지가 별세하자 슬픔을 이기 지 못하고 실신(失神)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장례 후에는 비바람에도 아랑곳하 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참배하여 제물을 놓고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고 종 13년(1876년) 마을에 흉년(凶年)이 들어 사람들이 끼니를 잇기 어렵게 되자 식구들이 겨우 연명할 양식만 남겨 놓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선행(善行)도 베풀었다. 향년 55세로 고종 23년(1886년) 돌아가시자 효행(孝行)이 알려져 나 라에서 돈녕부동지사(敦寧府同知事)에 추증(追贈)하고, 정려(旌閭)를 내렸다. 후산(後山) 허유(許愈)가 행장(行狀)을 지었고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가 정 려각의 기문(記文)을 지은 그의 효자각(孝子閣)이 고종 23년(1886년)에 지금 고령군 덕곡면 예리 230번지에 세워졌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성산이씨 세보(2008년) 고령문화사대계 2-사상편(2008년) ●이덕민(李德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