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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6 - 지더니 그 꼬리 잘린 잉어가 다시 배에 뛰어 올라왔다. 그 외 한겨울에 노모 (老母)께서 대추를 원해서 눈속을 헤매니 거미줄에 싱싱한 대추가 매달려 있어 구할 수 있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1년 후 제사상에 올릴 꿩이 마당에서 스 스로 죽었던 놀라운 이야기가 효자 성풍세의 고결한 효행과 더불어 전해 오고 있으며 효종 때 효행이 알려져 부역과 조세를 면제하는 복호(復戶)가 내려졌 다. 인조 27년(1649년)에 그가 별세한 후 상전(常傳) 성만휘(成晩徽)가 효행지 (孝行誌)를 짓고, 성산(星山) 이원조(李源祚)가 효행전(孝行傳)을 지었으며, 우 졸재(迂拙齋) 박한주(朴漢柱)가 정려의 현판과 제문을 썼다. 후손들은 영조 4 4 년(1768년) 지금 현재 고령군 다산면 나선로 292 (나정리 127번지)에 비 앞면 에 '효자성공휘풍세지비(孝子成公諱豊世之碑)'를 새겨 비를 세웠다. 비각 내에 숙종 38년(1712년) 조정에서 내린 '효자성풍세지려(孝子成豊世之閭)'의 정문이 세워져 있다.' 후에 사람들은 그의 효행이 온갖 행실의 근원이라 하며 그의 비 각을 백원문(百源門)이라 부르고 있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는 고령군 다산면 나정리 마곡(麻谷)에 있다. 참고문헌 : 고령군지(1996년), 고령문화사대계 2-사상편(2008년) ●오상옥(吳相玉) 본관은 고창(高敞)이며 자는 국서(國瑞)이고 호는 국포(菊圃)로 헌종 13년 (1847년)에 태어났다. 참의(參議)를 증직하였고 협판(協判) 벼슬을 한 오연순 (吳演淳)의 아들이자 죽유(竹牖) 오운(吳澐)의 11세손이다. 문장에 능숙하고 부 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홀어머니 달성서씨가 1901년에 중환(重患)으로 병 석에 계셨는데 봉양하는데 극히 정성을 다하였다. 비록 집이 가난하였으나 의 복과 맛있는 음식을 받드는데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병이 심하여 온갖 약 이 효험이 없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살폈다. 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으로 몸이 상하면서도 예를 극진히 하였다. 날마다 무덤을 살피는 것을 추위와 더위에도 거르지 않았다. 절하고 꿇어 앉은 자리에 풀이 마르니 이 같은 일이 알려져 집 의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효도로 널리 알려져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贈 職)되었고 경학원(經學院)에서 찬양문(讚揚文)인 효행표창완의문(孝行表彰完議 文)이 하달되었다.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소암(小庵) 김현동(金鉉東)이 행 장(行狀)을 짓고 근재(近齋) 정지순(鄭之純)이 비명(碑銘)을 지었으며 성산(星 山) 이만기(李万基)가 글을 썼던 ‘국포(菊圃) 오공(吳公) 효행비’가 1946년 성 산면 용기1리 마을회관 뒤편에 있는 고창오씨(高敞吳氏) 재실인 용암재(龍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