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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5 - 가 기어 나오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 그것으로 부모의 입맛을 되찾게 할 수 있 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를 하고 나서도 아침저녁으로 성 묘하는 일을 그치지 않아 묘 아래에 길이 하나 생겨났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 길을 “신효자로(申孝子路)”라고 불렀다. 사림(士林)에서 고을의 감영(監營)에 그의 효행(孝行)을 거듭 보고하여 ‘신효자로’에 돌을 깎아 표지(標識)을 세우게 하였으며, 성암(誠巖) 노근용(盧根容)이 비명을 지었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성풍세(成豊世)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주현(周顯)이다. 고려 시중(侍中)을 지낸 성송국 (成松國)의 13세손이며 조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창녕인(昌寧人) 성석린(成 石璘)의 후손으로 선조 25년(1572년)에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착하고 영 리하였으며 효심(孝心)이 지극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아침저녁으로 홀어 머니 앞에 문안을 드렸으며 어머니가 몸이 아파 눕게 되면 침식(寢食)을 전폐 하고 간호를 하여 마을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이 이 마을까지 쳐들어오자 그는 광산김씨(光山金氏) 어머니를 모시고 고령군 다 산면 노곡동으로 피난을 왔다. 왜병의 침략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가고 병역을 면제받을 삼베나 무명 따위를 나라에 바칠 수 없는 형편인 그는 군에 입대하 게 되었다. 상주진영(尙州鎭營)에서 훈련을 받는 중에도 그는 홀로 고생하는 홀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하루 180리길을 걸어 모친식사를 봉양하고 새벽에 다 시 귀대하는 생활을 하였다. 상주진(尙州鎭)과 그의 집까지는 길도 험하고 밤 에는 호랑이를 만나는 위험이 있었지만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집 까지 가는 도중에 호랑이 한 마리가 앞을 가로막고 옆드려 있기에“네가 날 잡 아먹으면 한꺼번에 두 목숨을 앗아 가는 게 된다”라고 했더니 호랑이가 꼬리 를 흔들며 타라고 시늉을 했다. 그후 모친봉양을 위한 먼길을 호랑이가 도와주 었고 이 놀라운 보고를 장교로 부터 들은 상관은 효행에 감동하여 제대를 시 켜주었다. 한 겨울 모친을 위하여 잉어를 구하는 그에게 강물이 갈라지더니 갑 자기 잉어 한 마리가 그 앞에 펄떡 뛰어 올랐다. 사공과 그가 서로 자기 잉어 라고 주장하다가 그가 잉어꼬리를 잘라서 물에 도로 넣으며 말하기를 “지금 나는 어머니 약을 구하러 급히 대구로 가는 길인데 이 잉어를 가지고 갈 수 없어 내가 대구 갔다 올 때까지 잠깐 이 강물에 두고 가야겠습니다” 효자의 이러한 말을 비웃었지만 얼마 후 다시 나룻배를 탓을 때 강물이 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