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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1 - 는데, 사사로이 재물을 쌓지 않아 다투는 일이 없었고 부인들 또한 화목하게 지냈다. 어머니 전주류씨(全州柳氏)가 병들자 인분(人糞)을 맛보며 병세(病勢 ) 를 살폈고, 82세에 세상을 뜨자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몸소 불을 떼어 조석(朝夕)을 받들어 올리는 등 예제(禮制)를 다하였다. 삼년집상(三年執喪)할 때 경대(經帶)를 그르지 않았고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 하는 동안 한 번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 삼강행실(三綱行實)이란 책에 그가 여묘(廬墓)하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선조 9년(1576년) 정려복호(呈閭復戶) 되었으며, 그의 행적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실렸다. 숙종 27년(1700년) 문연 서원(文淵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묘소는 고령군 개진면 오사2리에 있다. 참고문헌 :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년), 여지도서(1765년) ●박진문(朴震文)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는 데 정성을 다하였고 , 병이 깊어 위독(危篤)하자 피를 내어 약을 지어 올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초막(草幕)도 짓지 않고 무덤 옆에 기거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 복(感服)하여 여막(廬幕)을 지어 주었으나 들어가 거처하지 않고 밤이면 무덤 에 엎드려 슬피 울고 낮이면 나무에 매달려 목 놓아 큰 소리로 울기를 밥 먹 을 때를 제외하곤 그친 바가 없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효성을 높이 받들고 귀하게 여겨 포상(褒賞)을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박태중(朴泰重)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중래(仲來)이고 호는 용재(慵齋)이며 영모재(永慕 齋) 박성기(朴聖基)의 아들이다. 승지(承旨)를 지낸 박종주(朴宗冑)의 증손이며 양죽당(養竹堂) 박정완(朴廷琬) 5대손이다. 그는 5~6세에 이미 완숙한 군자(君 子)의 모습을 갖추었고, 장성하여서는 덕행(德行)을 겸비(兼備)하고 남다른 효 성(孝誠)과 우애(友愛)를 보여 향리의 칭송과 존경을 받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드려 소생(甦生)하게 하였고, 두 분의 상(喪)을 당해서는 6년간 시묘(侍墓)를 하였다. 그의 효행에 대해 175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