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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8 - ●노지도(魯至道) 본관은 강화(江華)이며 일휘(一諱)는 노지희(魯之熹)고 자는 섭이(燮而), 호는 적은(笛隱)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극예(魯克禮)와 성율(聲律)의 딸인 석산 김씨(螫山金氏) 사이에서 선조 3년(1570년) 태어났다. 공은 고령입향조 집의공 (執義公) 노승주(魯承柱)의 7세손이며 임진왜란을 당하여 아버지와 함께 왜구 에게 붙잡혀 그 칼날에 죽임을 당하려는 순간 아버지를 품에 안듯이 하여 칼 날을 막았다. 화가 난 왜구가 마구 칼을 휘둘러 온몸을 난자(亂刺)하였으나 이 에 굴하지 않고 네 번이나 사지(四肢)로 막아 사지(四肢)가 절단(切斷)될 때까 지 아버지를 보호하니 칼을 든 왜장(倭將)이 공의 효성(孝誠)에 크게 감복하여 칼을 접고 ‘효자(孝子)’라는 혈서(血書)를 남기고 물러갔다는 것이 손록(孫錄)과 고령읍지(高靈邑誌)에 실려 있다. 후손들은 공의 효성(孝誠)을 기리기 위해 개 진면 옥산2리 적산(笛山)에 추원재(追遠齋)를 세웠으며 상재헌(相齋軒) 김여진 (金旅振)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묘소는 고령군 개진면 구곡리 대점곡(大店谷 ) 에 있다. 참고문헌 : 삼강록(1872년), 고령읍지(高靈邑誌), 고령지(高靈誌) ●박기언(朴基彦)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인택(仁宅)이고 호는 도계(桃溪)이다. 아버지 박 영묵(朴永默)과 어머니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고종 28년(189 1 년)에 우곡면 도진리에서 태어났다. 21세 때인 1911년 10월 노모가 학질(瘧 疾)에 걸려 사경(死境)에 이르러 온갖 치병(治病) 노력에도 차도(差度)가 없자 , 인육(人肉)이 영약(靈藥)이라는 말을 듣고 심야(深夜)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 어 쇠고기라 속이고 노모에게 드려 병을 낫게 했다. 그 후 28세 때인 1918년 11월 6일 할아버지께서 매우 급작스럽게 병에 걸려 위급하게 약을 다려 몸소 드리고 밤낮으로 간병(看病)하였으나 효험이 없고 3일 후인 8일에 운명(殞命 ) 하니 땅을 치고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다가 문득 손가락을 잘라 할아버지의 입 에 피를 드리우니 거듭 깨어나시어 한나절 연명(延命)시켰다. 십여 년 후 192 8 년 6월 17일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애통(哀痛)함이 지나쳐 거의 실성(失性)하 였으며 집상(執喪) 삼년을 하나같이 예제(禮制)를 따랐으며 매일 성묘(省墓)하 여 비록 풍조우석(風朝雨夕)이라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의 사후 군내 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