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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6 - ●김영곤(金永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성여(聲汝)이고 호는 삼연재(三然齋)이며 아버지 는 김보경(金寶鏡)이다. 다산면 벌지1리 마을 앞에는 높은 소나무가 주위를 둘 러싸고 있는 효자문(孝子門)이 하나 있다. 이 효자문의 이름은 명정문(命㫌門 ) 이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명정문을 정려문(旌閭門)이라고도 불렀다. 효자문 주 변의 몇 그루의 높은 소나무가 오래된 세월을 말해 주고 있다. 명정문과 관련 해서는 김효자교관공행록(金孝子敎官公行錄)에서 설명하고 있다. 김효자교관공 행록은 조선시대 김석희(金錫熙)가 융희(隆熙) 3년(1909년)에 편찬하였으며 모 두 54장으로 구성되었고 목활자본이다. 김효자교관공행록은 조선시대의 성주 군(星州郡) 벌지리(伐知里)의 효자인 김영곤(金永坤, 1798년~1855년)의 효행을 기려 그 손자인 김석희(金錫熙)가 그의 효행과 여러 관련된 기록들을 모아 편 찬한 책이다. 그의 아버지는 김보경(金寶鏡)은 순조 12년(1812년) 임신년의 서 변(西變) 즉 홍경래 난에 사람을 모아 적과 대항하다가 정주(定州)의 승전(勝 戰)을 듣고 그쳤다고 한다. 그는 나이 60세가 다 되어 90세가 된 아버지의 병 구완을 지극 정성으로 하였는데, 아버지의 대변을 먹어보고 병세를 확인할 정 도였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꿈에 나타난 노인이 가르쳐 준 강 건너 30여 리 정도 되는 곳에 아버지의 무덤을 만들고 날마다 가서 살펴보곤 했는데, 하루는 강물이 불어 죽을 위기에서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목숨 을 구해주었던 일도 있었다. 3년 동안의 시묘(侍墓)를 마친 후에 그도 곧 병이 나서 죽었는데, 아버지의 묘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효행이 그 지역에서 계속 전해오다 그가 죽은 지 50여 년이 지 난 광무 9년(1905년)에 향리 유생들의 주청(奏請)으로 명정문(命㫌門)을 세우 게 되었고 칙명(勅命)을 받아 9품(9品) 종사(從仕) 중학교 교관(中學校 敎官)에 특증(特贈)되었다. 그의 손자인 김석희(金錫熙)는 학업이 뛰어나 선음(先蔭)으 로 숭혜전(崇惠殿)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이 책의 제목이 김효자교관공행록 (金孝子敎官公行錄)으로 되어 있는 것은 바로 김영곤(金永坤)에게 특증된 중학 교 교관의 직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효자교관공행록(金孝子敎官公行錄)은 김 영곤(金永坤)이 아버지인 김보경(金寶鏡)에 대한 효행(孝行)을 손자인 김석희 (金錫熙)가 편찬하였다고 한다. 효행의 가장 중요한 스토리는 아버지의 묘를 시묘(侍墓)하기 위해 낙동강을 건너 다녔는데 강물이 불어서 위험에 처했을 때 하늘이 효행에 감동하여 그를 도와주었다는 내용이다. 그의 효행은 현재 벌지 리 마을 입구에 있는 명정문(命旌門)의 내부에 세 벽면에 벽화로 그려져 있다 . 벌지리의 김석희의 문중 후손의 설명에 의하면 효행은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