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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5 - 이 그 파리하고 약함을 근심하여 그만두라고 하였으나 뜻을 빼앗을 수가 없었 다. 어머니께서 등창을 앓자 입으로 빨아 낫게 하였다. 노병이 더욱 심하여지 니 부르짖고 울었다. 깨끗이 목욕하고 하늘에 밤낮으로 기도하며 잠을 자지 않 았다. 겨울 달밤에도 웃옷을 벗고 벽을 뒤로하여 잠 오는 것을 견디었다. 상 (喪)을 당하여 몸이 쇠약하여 뼈만 남았는데 겨우 담제사(禫祭祀)를 지내고 죽 고 말았다. 영조 5년(1729년) 기유(己酉)에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쌀을 하사하 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증직(贈職)되었다. 그의 효행 사실은 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 개실마을 도로변에 세워져 있으며 성주(星州) 이주형(李主衡 ) 이 지은 일선김씨 오세 효행 사적비(一善金氏 五世 孝行事蹟碑) 등에 기록되 어 있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1765년), 삼강록(1872년),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김선명(金善鳴) 본관은 일선(一善)이며 자는 문원(聞遠)이고 호는 연한당(燕閒堂)이다. 김시사 (金是泗)의 아들이자 점필제(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8세손이다. 나이 15세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얼굴빛이 슬프고 곡하고 우는 것이 슬프니 조문(弔問 ) 하는 사람들이 기꺼워하여 말하기를 “어린 아이가 상(喪)을 치르는 예(禮)가 이 같이 의연(毅然)하니 지평(持平)의 아이가 될 만하다”하였다. 그 뒤에 어머니 상을 만나서 죽(粥)과 미음(米飮)으로 3년 상을 마쳤다. 어버이의 묘가 그의 집 에서 가깝지 않았으나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막론하고 날마다 묘를 보살피 고 쓸었다. 묘소에 난 풀에 절하고 꿇어앉은 흔적이 있으니 땔나무하는 아이와 소먹이 아이들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곳이 김효자 (金孝子)가 묘를 보살핀 곳이라고 하면서 피하여 감히 밟지 않았으며 무릎을 꿇은 곳에 풀이 자라지 못하였다. 늙어서 거처하는 집의 현판을 모헌(慕軒)이 라 하였으며 이로써 종신(終身)토록 부모를 사모하였다. 그의 효행 사실은 고 령군 쌍림면 합가1리 개실마을 도로변에 세워져 있으며 성주(星州) 이주형(李 主衡)이 지은 일선김씨 오세 효행 사적비(一善金氏 五世 孝行事蹟碑) 등에 기 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삼강록(1872년), 고령군의 비(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