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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0 - 과 재삼(在三)의 셋째 딸인 현풍곽씨(玄風郭氏) 사이에서 영조 15년(1739년) 8 월 19일 달성 해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헌걸차고 두 눈이 밝게 빛나니 보는 사람들이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고 칭찬하였다. 11세에 칠계(漆溪 : 웇골 ) 의 족형(族兄)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을 찾아가 수학하였으며 문리(文 理)가 뛰어나 1년 이내에 통감(通鑑),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 (孟子) 등을 다 읽었다. 20세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수학하였으며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등 대학자와 교유하였 다. 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 폐위(廢位) 및 참살사건(慘殺事件)이 발생하자 여러 날 통읍(慟泣)하며 학업을 폐하였다. 영조 46년(1770년) 경상감영에서 반 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간행할 때 도내의 명유 (名儒)들과 교정(校正)에 참여하였다. 정조 2년(1778년) 겨울 고령 미숭산(美崇 山) 아래 공의 처족(妻族)이 있는 곳으로 이거(移居)하였다 1783년 봄 아림(娥 林) 동당시(東堂試), 회시(會試)에서 실패하고 정조 7년(1784년) 가을 대과(大 科) 정시(庭試)에 응했으나 실패하자 모친의 만류로 과거 보기를 포기하였다 . 주자(朱子)의 사창법(社倉法)을 의방(依倣)하여 향약(鄕約)을 개설하여 실시하였 다. 공은 대학(大學), 중용(中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서절요(朱書節 要), 성리대전(性理大典) 등을 읽으면서 도학(道學)에 열중했다. 만년(晩年)에 고령에 우거(寓居)하면서 십 수 년 간 문학을 창도(唱導)하였는데 문하(門下)에 서 대소과 급제자가 7, 8명이나 되었다. 이광정(李光庭), 정종로(鄭宗魯), 최흥 립(崔興岦) 등과 교유하였다. 심학연원초통절편(心學淵源抄通節編), 삼충록(三 忠錄)과 두와문집(蠹窩文集) 17권 8책을 저술하였으나 현재 문집만 전한다. 순 조 12년(1812년) 1월 19일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용2리 반룡사 동 쪽에 있다. 배위는 계후(季垕)의 딸인 고창오씨(高敞吳氏)이다. 참고문헌 : 두와(蠹窩) 최흥벽(崔興璧)의 생애와 시세계, 고령대관(1959년) ●허명신(許命申)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군익(君益)이고 호는 치재(癡齋)이다. 참봉(參奉 ) 을 지낸 홍(弘)과 원종공신(原從功臣) 징(澄)의 딸인 고령신씨(高靈申氏) 사이 에서 선조 2년(1569년) 11월 17일에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송암 (松菴) 김면(金沔)에게 글을 배워 학문 연마에 힘쓰는 한편,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족과 화목하였다. 공의 학문은 여러 종류를 배워 그 명성이 일찍이 세상에 알려졌고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결국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