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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9 -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초휘(初諱)는 창석(昌錫)이고 자는 주백(周伯)이며 호는 요암(饒庵)이다.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학서(鶴棲) 승태(升泰)와 지우(志愚)의 딸인 공인(恭人) 밀양변씨(密陽卞氏) 사이에서 철종 8년(1857년) 2월 1일 고령 군 쌍림면 학동(鶴洞) 본제(本第)에서 태어났다. 천품(天稟)이 너그럽고 온화했 으며 거동(擧動)과 용모가 단정(端正)하였다. 6세부터 수강(受講)하였으나 증조 부 향오공(香塢公) 상원(尙遠)이 교독(敎督)하지 않아도 자력(自力)으로 학문에 힘써 날로 진취(進取)하였고 이따금 의표(意表)를 찌르는 질문을 하여 주위 사 람을 놀라게 하니 향오공(香塢公)이 기애(奇愛)하였다. 당대의 명석(名碩) 농산 (農山) 장승택(張升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 등에게 다소(多少) 유교경전에 관한 경의(經義)를 강질(講質)하기도 하였다 . 1905년 겨울 서간(西澗) 박한열(朴漢烈)과 함께 거창(居昌) 아림(娥林) 객관(客 館)에 있는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을 찾아가 뵙고 고금(古今)의 현인 (賢人)과 성인(聖人)들의 출처지의(出處之義)와 국가치란지도(國家治亂之道)에 관하여 논하였는데 공이 해법을 명쾌하게 제시하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 선생이 탄복(歎服)하며 크게 칭찬(稱讚)하였다. 1902년 학곡(鶴谷) 최원(崔遠 ) 과 매헌(梅軒) 최여설(崔汝契)이 선조(先祖)를 현창(顯彰)하기 위해서 학매정(鶴 梅亭)을 세웠으며 1922년 겨울에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송애재(松厓齋)에 서 강학계(講學契)를 만들여 경전을 강송(講誦)하고 시를 지어 읊기도 하였다 . 조부 송애(松厓) 호문(虎文)의 유고(遺稿)를 모아 송애문집(松厓文集)을 발간하 였다. 1923년 1월 27일 향년 67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서학 동(西鶴洞) 상촌후(上村後) 숙인곽씨(淑人郭氏) 묘하(墓下) 간좌(艮坐)에 있으며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요암유집(饒庵遺集)이 전하며 서(序)는 일헌(一軒) 이규형(李圭衡)이 썼다. 배위는 통정대부(通政大夫 ) 극규(極奎)의 딸인 성산전씨(星山全氏)이다. 註1)출처지의(出處之義):나아가 벼슬하는 일과 머물러 집에 있는 일에 관한 의 리(義理)이다. 註2) 국가치란지도(國家治亂之道):국가의 혼란을 다스리는 방법을 말한다. 참고문헌 : 양천최씨 세보(임술보), 요암유집(饒庵遺集) ●최흥벽(崔興璧)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사교(士敎)이고 호는 두와(蠹窩)이다. 사석(師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