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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7 - 리설(心卽理說)’과 ‘심성일물설(心性一物說)’을 비판하였다. ‘성리도설(性理圖 說)’을 통하여 천(天), 성인(聖人), 군자(君子), 소인(小人)으로 권역(圈域)을 구 분한 것은 기(氣)의 청탁수박(淸濁粹駁)에 의한 것으로 기질변화(氣質變化)를 통해 소인은 군자로 군자는 성인으로 다가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변화기질(變 化氣質)의 수양론(修養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경천애인설(敬天愛人說)’을 지 어 하늘을 높이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유학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 다. ‘서경설(鋤苘說)’에서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을 제거해야 함을 약초인 방풍밭의 김매는 것에 비유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물(四 勿). 사절(四絶), 구사(九思), 구용(九容)을 제시하였다. ‘혈기잠(血氣箴)’에서 모 든 재앙(災殃)의 출발은 혈기(血氣)를 조절하지 못함에서 기인(基因)하였다고 보고 혈기를 조절하여 중화(中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학문과 수양의 목표로 삼았다. 봉강(鳳岡) 선생의 삶과 학문은 난세(亂世)에 유학의 도(道)를 수호하 고 속세(俗世)에 전수(傳授)해 주려는 수도(守道)와 전도(傳道)에 그 중심이 있 었다. 항일 유학자 시암(是菴) 이직현(李直鉉), 미강(渼江) 박승동(朴昇東) 등 선현(先賢)을 따르고 당대의 명유(名儒)이었던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 석농 (石農) 오진영(吳震泳) 등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門人)과 교유하였다 . 공에게 수학(受學)한 김재철(金在哲), 조긍환(曺兢煥) 등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 에 보답하고 동문간(同門間) 우의(友誼)를 돈독하게 하고자 생시(生時)에 삼일 계(三一契)를 모아 1938년 강학소(講學所)인 후송재(後松齋)를 건축하여 매년 후학들이 정읍례(庭揖禮)를 행하였다고 한다. 현재 후송재(後松齋)는 고령군 향 토문화유산 유형자산 제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공의 생시(生時)에 제자들이 봉강문집(鳳岡文集) 2권을 간행하였는데 2012년 증손 택상(澤相)이 독담(獨擔 ) 으로 한글번역본을 반질(頒帙)하였다. 을유(乙酉) 1945년 10월 9일 수(壽) 7 0 세로 졸(卒)하여 묘는 용악(龍岳)의 딸인 초취(初娶) 충주석씨(忠州石氏)와 고령 군 다산면 송곡촌 뒤편 고묘(考墓) 좌상(左上) 인좌(寅坐)에 합폄(合窆)이며 재 취(再娶)는 나주임씨(羅州林氏)로 공의 묘소 아래 간좌(艮坐)에 있다. 묘갈명(墓 碣銘)은 은진(恩津) 송재성(宋在晟)이 근찬(謹撰)하였고 2012년 입춘절(立春節 ) 에 후학(後學)들이 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고자 성균관 관장 최근덕(崔根德)이 근찬(謹撰)하고 성균관 부관장겸전례위원장 강동숙(姜東琡)이 근서(謹書)한 ‘봉 강선생창녕조공송덕비(鳳岡先生昌寧曺公頌德碑)’를 세웠다. 공은 퇴계학파가 아닌 기호학파(畿湖學派)에 속하였지만 탁월한 학문적 성취(成就)로 명망(名望 ) 이 높았던 유학자(儒學者)로 향중사림(鄕中士林)들이 추앙한다. 참고문헌 : 봉강문집, 봉강 조상의 학문과 사상, 창녕조씨태복경공파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