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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4 - 스러운 병으로 1911년 음력 4월 10일 향년 41세로 졸(卒)하였다. 배위는 시화 (時華)의 딸 성산이씨(星山李氏)이며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 1리 화갑 진 전곡산(榛田谷山) 해좌(亥坐)이다. 성암(誠菴) 노근용(盧根容)이 묘갈명(墓碣銘 ) 을 짓고 시헌(是軒) 이성훈(李星勳)이 묘지(墓誌)를 지었다. 유고(遺稿)로 화계 문집(花溪文集) 6권이 있었으나 병난(兵亂)으로 소실되었다. 註)속수지례(束脩之禮) :묶은 육포의 예절이라는 말로, 스승을 처음 만나 가르 침을 청할 때 작은 선물을 함으로써 예절을 갖춘다는 뜻이다. 참고문헌 : 율산집(栗山集), 만구집(晩求集), 화계부군(花溪府君) 행략(行略) ●정만중(鄭萬中) 본관은 진양(晋陽)이며 초휘(初諱)는 취망(就望)이고 자는 도일(道一)이며 호는 삼천(三川)이다. 유학(幼學) 반구암(反求巖) 광세(光世)와 어머니 포산곽씨(苞山 郭氏) 사이에서 순조 22년(1822년) 윤 3월 2일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性品)이 보통사람과 달리 뛰어났으나 가정이 빈곤하여 공부에 진력(盡力)하지 못했다 . 성리학(性理學)에서 기(氣)의 우위를 주장하는 일원론적(一元論的)인 주기파(主 氣派)에 속하였으며 천주학(天主學)을 극력 배격하고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던 조선 후기의 대유학자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를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평생에 유교경전인 춘추(春秋)를 좋아하니 당시 사람들이 ‘정춘추(鄭 春秋)’라고 불렀다. 고산(鼓山) 선생이 직접 삼천(三川)이라는 호(號)를 써서 주 었다. 또한 진양정씨 을해보(乙亥譜 : 1875년 발간) 발문(跋文)을 썼다. 묘는 내곡(內谷) 방귀허(方貴墟) 임좌(壬坐)에 있으며 조선 후기 대구의 거유(巨儒)인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가 행장(行狀)을 지었다. 배위는 파평염씨(坡平廉氏 ) 이며 아버지는 경락(慶樂)이며 증(贈) 영의정(領議政) 정수(廷秀) 후손이다. 헌 종 9년(1843년) 4월 16일 태어나 고종 7년(1870년)윤 10월 8일 졸(卒)하였다 . 묘는 와산(蛙山 : 개골산) 선영(先塋) 아래 건좌(乾坐)에 있다. 참고문헌 : 진양정씨 족보(을유보), 임재선생문집(臨齋先生文集) ●정재송(鄭載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