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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 - 리사상(性理思想)의 특징은 가학적(家學的) 전통과 자신의 학문적 취향을 따라 정통적인 퇴게학파의 입장을 견지하고 지나치게 이발(理發)‧ 기발(氣發)만을 강 조하는 성리적 입장에서는 회의적이었으며 이기공존(理氣共存)의 입장을 강조 했다. 둘째 예학사상의 특징은 예(禮)의 실행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상황논리 (狀況論理)를 강조했다. 즉 실질과 현실의 측면을 중시하고 형식논리에 얽매이 지 않았다. 셋째 불교(佛敎)와 서학(西學)에 관한 견해에 관해서는 불교에 관해 서는 비교적 온건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서학에 대해서는 강경한 척 사의식(斥邪意識)을 보였다. 고종 39년(1902년) 음력 3월 28일 향년 66세로 고종(考終)하였다. 장례 때 모인 인파는 천 수백 명이 되었고 묘소는 고령군 다산면 월성리 산 99번지 술좌(戌坐)에 있다. 문인(門人) 눌재(訥齋) 김병린(金 柄璘)이 묘갈명(墓碣銘)을, 족질(族姪) 이기로(李基魯)가 행장(行狀)을 지었다 . 저서로는 사후(死後) 6년뒤에 발간된 『만구집(晩求集)』있는데, 원집 10책과 속 집(續集) 4책과 부록(附錄)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86년 영인본(影印本)으 로 재간(再刊)되었다. 1950년 6·25전쟁을 거치면서 고종 29년(1892년)에 건립 된 서락서당(西洛書堂)이 소실되고 모든 문적(文籍)이 불에 타 없어지자 195 1 년부터 16개 지역(고령, 성주, 대구달성, 칠곡, 김천, 영천, 청도, 창녕, 밀양 , 의령, 합천, 초계, 창원, 칠원, 함안, 사천)에 있는 그의 후손과 문인 등 1,53 7 명이 모금에 참여하여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281-3에 서당 복원 작업이 이루 어졌다. 2015년 10월 9일 한국국학진흥원(韓國國學振興院)에 소장되었던 만구 (晩求) 이종기(李鍾杞) 선생의 문집 책판 413장이 ‘유교책판(儒敎冊版)’과 함께 제12차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저술로 문집 10책 17권이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의 편집 교정을 거쳐 1907년 발간되었고 1936년 속집 4책 8권이 이어서 부록2책이 발간되었으며 1986년에 영인본으로 개간되었다. 시와 만사 335수, 서 399편, 잡저 13편과 묘갈명, 행장, 기, 서 , 발 등이 실린 거질(巨帙)로 손꼽히고 있다. 초취(初娶)는 종희(宗熙)의 딸인 광 산이씨(光山李氏)이고 재취(再娶)는 교관(敎官)을 증직(贈職)받은 기인(基寅)의 딸인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참고문헌 : 전의이씨 부정공파보(경인보), 경북인물사전, 만구(晩求) 이종기(李 種杞)의 삶과 사상적 특징, 고령군지(1996년) ●이진의(李震義)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자는 동언(東彦)이고 호는 봉강(鳳岡)이다. 유생(儒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