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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1 - 구(晩求)이다. 생부(生父) 능용(能容)과 생원(生員)을 지낸 이원(以元)의 딸인 광주이씨(廣州李氏)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헌종 3년(1837년) 고령군 다 산면 상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당숙(堂叔)인 현용(鉉容)에게 출계(出系)하 였다. 학문이 조숙(早熟)하여 이미 14세에 회연서당(檜淵書院) 강회(講會)에 출 입하여 질문과 토론으로 당시의 노장(老長) 유학자(儒學者)를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만구(晩求)의 학문의 연원은 가학(家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대산(大 山) 이상정(李象靖)의 학맥(學脈)과 연계되었다는 점이다. 생부 능용(能容)은 진 사(進士)인 숙부 오려(吾廬) 재선(在翧)에게 배웠고 오려(吾廬)는 백부(伯父) 벽 재(躄齋) 규운(奎運)에게 배웠고 벽재(躄齋) 이규운(李奎運)은 대산(大山) 이상 정(李象靖)의 문인(門人)이었으며 이상정(李象靖)의 학맥을 이은 정재(定齋) 유 치명(柳致明)을 사숙(私塾)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금주(錦洲) 허채(許埰 ) 가 지은 만구집(晩求集)에 기록되어 있으며 장인(丈人)인 광산이씨 소암(小庵 ) 종희(宗熙)는 외증손(外曾孫)인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학풍을 이었던 점 도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 (門人)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윤영선(尹榮善)이 우리나라 유현(儒賢)들의 연원 (淵源)을 도표식(圖表式)으로 편저(編著)한 책인 조선유현연원도(朝鮮儒賢淵源 圖)에 공은 허전(許傳)의 문인(門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은 영남학맥(嶺南學 脈)의 정통적 이론을 심화한 마지막 성리학자(性理學者)이다. 유일(遺逸)로 의 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除授)받았지만 헛된 이름으로 임금을 속일 수 없 다고 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이기설(理氣說)을 수용하 였지만 이(理)와 기(氣)에 치우친 이론의 획일화(劃一化)에 반발(反撥)하는 개방 적(開放的)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理)와 기(氣)의 조화(調和)와 공존(共存)을 강 조하는 균형(均衡)잡힌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러한 그의 이기(理氣)에 대한 이 론은 「사칠기발이승지변(四七氣發理乘之辨)」, 「이기선후주종편전설(理氣先後主 從偏全說)」 등의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장(院 長)에 두차례나 천임(薦任)되는 등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일세(一世)의 사표(師表)로서 추앙(推仰)을 받았다. 또한 경상북도 고령군(高靈郡) 다산면(茶 山面) 상곡(上谷) 마을에 서락서당(書洛書堂)을 만들고 200여명의 제자를 양성 하였으며 당대의 선배 유학자인 고헌(顧軒) 정래석(鄭來錫), 사미헌(四未軒) 장 복추(張福樞)는 공을 중(重)히 여겨 의지하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서산(西山 ) 김흥락(金興洛)은 사표(師表)로 칭하였으며 임종(臨終)할 무렵 평생 한 번밖에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을 탄식했으며 자제들에게 둿일을 만구(晩求)에게 맡기라 고 유언(遺言)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그의 학문(學文)과 덕행(德行)이 매우 탁 월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종기(李種杞)의 사상적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