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page

- 230 - 라고도 한다.. 참고문헌 : 상제통해(喪祭通解), 전의이씨 부정공파보(경인보) ●이신문(李信文)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字)는 술원(述元)이고 호(號)는 죽계(竹溪)이다. 조선 태종 3년(1403년) 계미생(癸未生)이며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이며 명상(名相)인 황희(黃喜)의 문인이다. 덕행과 문장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문장(文章)과 학행(學行)이 당대에 드 러나서 이웃 고을에 사는 여러 사람들이 책을 끼고 옷섶을 추스르고 배우러 오는 자가 매우 많았다. 늘그막에는 고령현 반성면 내상동 즉 현재 고령군 고 령읍 내상리에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정사(精舍)를 지었으니 곧 미숭산성의 북 쪽 문수봉(文壽峰) 밑이었다. 일찍이 황곡산(黃谷山) 아래 황폭(黃瀑)의 냇가에 대를 심고 죽계거사(竹溪居士)라 자호(自號)하였으나 세조 5년(1460⃝년) 경진년 (庚辰年) 10월 12일에 졸(卒)하였다. 공이 졸(卒)한지 3년이 지난 세조 9년 (1464년) 문인(門人)들이 함께 의논하여 계(稧 : 단체)를 만들어 문수산(文壽 山) 아래 장자골 입구 현재 동래정씨 문중 묘역이 있는 곳의 계곡옆에 죽계사 (竹溪祠)란 사당(祠堂)을 세우고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죽계사(竹溪 祠) 앞에 애련지(愛蓮池)란 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으나 지금은 단지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여러 차례의 병화(兵禍)를 겪어 죽계사(竹溪祠)란 사당(祠 堂)은 소실(燒失)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죽계사(竹溪祠)가 있던 곳을 ‘사당터’로 부르고 있다. 따라서 공의 후손들이 2015년 4월 18일 ‘여주이씨(驪 州李氏) 황곡(黃谷) 유허비(遺墟碑)’를 세워 그러한 사실을 기념하고 있다. 묘 는 고령군 고령읍 내상리 산 11번지 1 소재 황곡(黃谷) 입구 해좌(亥坐)에 있 으며 성주군 월항면 한계리(大浦里) 거주 유림(儒林) 성산인(星山人) 극암(克 菴) 이기윤(李基允)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배위는 세웅(世雄)의 딸인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여주이씨 세보(병신보) ●이종기(李種杞)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초명(初名)은 종도(鍾燾)였고 자는 기용(器容), 호는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