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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 훈(塤)의 장남으로 철종 1년(1850년) 12월 25일 태어났다. 고종 31년(1894년 )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장사랑(將仕郞) 행(行) 권지(權知) 승문원 (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지냈다. 고종 34년(1897년) 6월 22일 졸(卒)하였다 . 묘는 합천군 합천읍 금양리 뒤편 잔점등(盞店嶝) 인좌(寅坐)에 있으며 합폄(合 窆)이다. 배위는 진사(進士) 이정(以珽)의 딸인 공인(恭人) 광주노씨(光州盧氏 ) 이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59년), 일선(선산)김씨 문충공파(文忠 公派) 세보(기축보) ●김남득(金南得)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초휘는 기지(麒芝), 자는 중서(重瑞)이며 고려 때 전리 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김의(金宜)와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낸 유신(由信 ) 의 딸인 진천송씨(鎭川宋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충혜왕 1년(1340년 ) 에 진사시(進士試)에 국자시(國子試)에 급제한 후 공민왕 때 감찰집의(監察執 義),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공양왕 때 서해도관찰사(西海道觀察 使)·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공민왕 13년(1364 년)에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擁立)하려는 공민왕폐위음모 사건(恭愍王廢位陰謀事件)에 접반시랑(接伴侍郞)이 되어 무고함을 역설하여 원 나라 황제의 마음을 돌리게 하여 공민왕의 왕위보전에 공을 세웠다. 또한 사은 사(謝恩使)로 원나라에 가서 금자광록대부이부상서(金紫光祿大夫吏部尙書)의 벼슬을 받고 환국하자, 익대공신(翊戴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판개성부사(判 開城府事)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졌고 고양(高陽)을 식읍(食邑)으로 받 고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 즉 ‘영남에서 왕의 뜻에 맞는 인재를 얻었다’ 라는 뜻의 이름을 하사(下賜)받아 남득(南得)으로 개명(改名)하였고, 후손들은 의성김씨(義城金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고령(高靈)을 본관(本貫)으로 하고 공을 득관조(得貫祖)로 하였다. 공양왕 때에는 서해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으 며, 밀직제학(密直提學) 이지(李至)와 함께 명나라에 정조사(正朝使 : 정월 초 하룻날 새해 축하사신)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정몽주(鄭夢周)가 제거될 때 그 일당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한편 그는 일찍이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내 면서 관아 동쪽에 정자 하나를 세웠는데 이색(李穡)이 이 정자를 풍영루(風詠 樓)라 이름하여 기문(記文)을 썼으며, 이숭인(李崇仁)도 이 정자에 대한 시를 남겼다. 조선이 건국되자 그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에 방치(放置)되었다.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