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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8 - 직장(直長)을 제수(除授)받고 부임(赴任)하여 같은 해 11월 20일 서울에서 향 년 31세로 졸(卒)하였다. 묘(墓)는 삼대(三大) 대곡(大谷) 양변(陽辺) 선비묘우 (先妣墓右) 술좌(戌座)이다. 문집으로 죽오일고(竹塢逸稿)가 전한다. 배위는 예 빈시(禮賓寺) 부정(副正)을 지낸 종무(宗懋)의 딸인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참고문헌 : 광산이씨 한림공 영남파 족보(신묘보), 광산이씨 성주파 연원록 ●이명기(李命夔)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극화(克和)이고 호는 불일헌(拂日軒)이다. 광거재 (廣居齋) 이당의 장남으로 선조 13년(1580년)에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 逑) 선생의 문인이며 진실로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다. 임천(林泉)에 뜻을 두었 으며 엄숙하고 공손하게 처신하였으며 소학(小學)을 근본으로 하여 후손들을 가르쳤다. 인조 15년(1637년) 10월 13일에 향년 58세로 졸(卒)하였다. 묘(墓 ) 는 송곡상동(松谷上洞) 해좌(亥坐)에 있다. 문집으로 불일헌유고(拂日軒逸稿)가 전한다. 배위는 병사(兵使) 삼달(三達)의 딸인 용궁전씨(龍宮全氏)이다. 참고문헌 : 광산이씨 한림공 영남파 족보(신묘보), 광산이씨 성주파 연원록 ●이문룡(李文龍)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회숙(晦叔)이고 호는 국포(菊圃)이다. 선조 초에 유일(遺逸)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했던 동례(東禮)와 전첨(典籤) 진(鎭)의 딸인 공인(恭人) 회산황씨(檜山黃氏) 사이에 서 차남으로 선조 17년(1584년) 9월 14일에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인조 5년(1627년) 홍다시란(洪多時亂)에 백씨 이현 룡(李見龍)과 창의(倡義)하였으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서 항복(降伏) 하였 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미산(薇山)아래에 조그마한 정자 (亭子)를 짓고 세상을 피해 살며 강도(講道)에만 힘쓰니 세칭 미산처사(薇山處 士)라 하였다. 당대의 명류(名流)인 백천(白川) 이완정(李浣亭), 동호(東湖) 배 등암(裵藤菴) 등과 교유(交遊)하였다.효종 6년(1655년) 12월 26일 향년 72세에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기산동 뒤쪽 임좌(壬坐)에 있다. 문집 2권이 있으며 후손 진상(震相)이 행장(行狀)을 지었고 참찬(參贊) 곽종석(郭鍾錫)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