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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6 - 사변(乙未事變)을 성토(聲討)하고 단발령(斷髮令)의 철회(撤回)를 요구하는 상 소(上疏)를 올렸다. 그러나 수령이 거부되자 일본의 행동이 국제적으로 비난받 아 마땅함을 호소하며 국제적으로 협조를 구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의 공의 초고(草稿)를 바탕으로 작성된 최종본을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주한(駐 韓) 각국 공사관(公使館)에 발송하였다. 고종 34년(1897년)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에 내산서당(乃山書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수십명의 제자를 가르쳤는데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 및 반민특위(反民特委) 위원장(委員長)을 지낸 영 주(令州) 김상덕(金尙德)이 있다. 고종 39년(1902년) 스승 한주(寒洲)의 학설을 이단(異端)으로 규정한 통문(通文)이 전국 유림에게 발송되고 스승의 문집에 대한 변란(變亂)이 일어나자 공이 말하기를 “죽음을 무릅쓰고 어려운일에 노력 하는 것이 스승을 섬기는 도리이다”하고 솔선(率先)하여 멀리 달려가 성균관 유생(儒生)들에게 성명서(聲明書)를 발표하고 이를 적극 변무(辨誣)를 하였다 . 동문(同門)들이 시류(時流)에 편승(便乘)하여 스승의 문하를 떠나갈 때에도 흔 들림없는 지조(志操)를 지키는 의리(義理)를 보였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배일(排日) 언론투쟁(言論鬪爭)을 하였다 . 1907년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자 고령군 단연 상채회(斷煙償債會) 회장(會長)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 후 블라디보스톡에 망명해 있던 이승희(李承熙)를 따라 망명(亡命)을 결심하였 고 고령 지역의 강계(疆界)와 연혁(沿革) 등을 엮은 사찬읍지(私撰邑誌)인 고령 지(高靈誌)를 편찬하였다. 1913년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과 함께 만주(滿 洲) 등지의 망명지(亡命地)를 방문하였다. 1914년 만주의 봉천(奉天)으로 가 있던 이승희(李承熙)를 방문하여 현지상황을 살피고 돌아와 제자인 황학래(黃 鶴來)를 보내 농지를 구입하고 전 가족이 이주(移住)할 구상을 하였다. 191 6 년 이승희(李承熙)가 별세하자 망명의 뜻을 접었다. 이후 1918년 별세할 때까 지 내상리에 내산서당(乃山書堂)에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여력(餘力)으로 한 주(寒洲) 선생이 지은 이학종요(理學綜要)와 춘추집전(春秋集傳)의 간행에 참여 하였으며 신안세고(新安世稿), 동화세기(東華世紀) 등을 지었다. 1918년 3월 20일 향년 63세로 내산재(乃山齋)에서 졸(卒)하였다. 한 달을 건너 문수산 밑 에 장사할 때 문인들은 모두 흰 두건을 쓰고 관을 받들었으며 호상(護喪)한 사 우들이 7백 ∼ 8백 명에 이르렀다. 묘는 그후 고령군 덕곡면 명곡 고조비(高祖 妣) 도씨(都氏) 묘하(墓下) 계좌(癸坐)로 이장(移葬)하였다. 공은 후산(后山) 허 유(許愈)·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자동(紫東) 이정모(李正模) ·교우(膠宇) 윤 주하(尹冑夏)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물천(勿川) 김진우(金鎭祐) ·대계(大 溪) 이승희(李承熙) 등과 함께 주문팔현(洲門八賢 : 한주 이진상 문하의 8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