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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5 - 즐겼으며(篤信好學) 선도(善道)를 지킬 것(守死善導)을 허여(許與)하였다. 선조 26년(1593년) 1월 5일 향년 43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덕곡면 반성동 양산촌(良山村) 금암(琴庵) 고방(高方) 선조상(先兆上) 건좌(乾坐)에 있다.세고 (世稿)에 실기(實記)가 있다. 매와(梅窩) 최린(崔轔)이 지은 행장(行狀)에서 이 르기를 “공은 나이가 많지 않아도 덕(德)은 더욱 높았고 학문은 이미 정미(呈 媚)하여 뜻은 더욱 돈독(敦篤)하였다” 고 하였으며 지애(芝厓) 정위(鄭煒)도 행 장(行狀)에서 이르기를 “ 학문이 정박(精博)하고 행의(行誼)가 독실(篤實)하여 원근(遠近)의 명유(名儒)들이 추앙(推仰)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 배위는 전첨(典籤) 진(鎭)의 딸인 공인(恭人) 회산황씨(檜山黃氏)이다. 참고문헌 : 성산이씨 세보(무자보), 고령대관(1959년), 고령군지(1996년) ●이두훈(李斗勳)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초휘(初諱)는 중훈(中勳)이고 자는 대형(大衡), 호는 홍 와(弘窩)이다. 사한당(四閒堂) 인한(寅漢)과 서부(西阜) 지운(芝運)의 딸인 광주 이씨(廣州李氏) 사이에서 철종 7년(1856년) 장남으로 외가인 칠곡군 지천면 신 리(웃갓)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엄격한 교도하(敎導下)에서 생장(生長)하였다 . 처음에는 김희진(金希鎭)의 문하에서 글을 익혔다. 고종 4년(1867년) 고령현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壯元)을 하여 고령현감(高靈縣監) 이수겸(李秀謙)이 불러 칭찬을 받았다. 성년이 된 뒤에는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에게 배웠다 . 고종 12년(1875년)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하(門下)에 들어가 위기지학 (爲己之學)에 힘쓰며 심즉리(心卽理)의 요지(要旨)를 듣고 흔연(欣然) 하게 마 음으로 깨달아 가슴속에 새겨두고 독실하게 믿었다. 고종 17년(1880년) 서울에 서 열린 소과(所科)에 응시하여 시권(試券)을 제출하였으나 모친의 환후소식으 로 환향(還鄕)하였으나 모부인이 이미 운명(殞命)하였다. 삼년상을 마친뒤에 사 람들이 과거를 권유하자 “ 내가 그 과거 때문에 천지간에 큰 죄를 지었거늘 또다시 그 걸음을 하겠는가?”하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고종 23년(188 6 년) 스승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이 별세하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 등과 고령 반룡사(盤龍寺)에서 강학(講學)하였다. 고종 31년(1894년) 동학군(東 學軍)의 소요(騷擾)를 피해 경남 거창으로 이주하여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 과 함께 한주집(寒洲集) 초간본 25책의 간행에 참여하였다. 고종 33년(1896년 ) 동문(同門)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교우(膠 宇) 윤주하(尹胄夏) 등과 함께 상경하여 연명(連名)으로 대궐문에 나아가 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