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page

- 221 - 야방(所也坊) 덕산(德山) 해좌(亥坐)이다. 배위는 선교랑(宣敎郞)을 지낸 택선 (擇善)의 딸인 일선김씨(一善金氏)이다. 참고문헌 : 광산이씨 한림공 영남파 족보(신묘보), 광산이씨 성주파 연원록 ●이규운(李奎運)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초명(初名)은 형(逈)이고 자는 향지(向之), 호는 벽재 (躄齋)이다. 생부(生父) 필신(弼臣)의 장남으로 영조 15년(1739년)에 태어났다 . 당숙(堂叔) 계신(桂臣)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천품(天稟)이 침착하고 사람의 됨 됨이가 가볍지 않았으며 학문(學文)이 넓고 심오하였다. 일찍부터 대산(大山 ) 이상정(李象靖)의 문하(門下)에서 배워 성리학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당대의 명유(名儒) 지암(遲菴) 이동항(李東沆), 만각재(晩覺齋) 이 동급(李東汲), 가곡(家谷) 장경목(張敬穆) 등과 교유하면서 가야산 포천에서 구 로회(九老會)를 만들어 풍류(風流)를 즐겼고 박성수(朴聖洙) 등 제현(諸賢)과 이강(伊江)과 낙강(洛江)의 물이 합쳐지는 파산(巴山)의 절경에 이락서당(伊洛 書堂)을 지어 왕래하면서 시문을 짓고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일찍이 가문의 쇠 퇴함을 근심하여 문내에 기박과 같은 오락들을 모두 물리치고 시문과 성리의 이치(理致)로 자질(子姪)들을 가르쳐 문과 2명, 사마 3명을 포함하여 10여인을 성취(成就)시켰고 나중에 만구(晩求)같은 큰 선비를 배출시킨 기틀을 마련하였 으니 이로써 다산이학(茶山理學)을 창시한 분으로 일컬어진다. 행동이 아는 것 을 따르지 못한다 하여 앉은뱅이와 같다고 여겨 의벽설(醫躄說)을 짓고 스스로 호를 벽재(躄齋)라 하였다. 정위(鄭煒)와 더불어 인성(人性)의 물성(物性)과 같 고 다름을 논하기를 수천마디 말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순조 6년(1806년) 향 년 68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다산면 상곡촌 앞 건좌(乾坐)에 있다. 고 종 20년(1883년) 현손 기로(基魯)와 5대손 민세(民世)가 그의 4권 2책의 시문 집(詩文集)인 벽재문집(躄齋文集)을 편집, 간행하였다. 배위는 명화(命和)의 딸 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참고문헌 : 벽재문집(躄齋文集), 전의이씨 부정공파보(경인보), 입재(立齋) 정종 로(鄭宗魯) 묘갈명(墓碣銘) ●이근용(李根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