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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8 - ●오경정(吳慶鼎) 본관은 고창(高敞)이며 자는 재빈(載賔)이고 호는 괴석정(槐石亭)이다. 유학 (幼學) 현창(顯敞)과 의중(毅中)의 딸인 여주이씨(驪州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영조 32년(1756년) 2월 13일에 태어났다.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궁금한 것을 묻고 배우는 것이 자상하고 세밀하였다. 현와(弦窩) 윤동야(尹東野), 학양(鶴陽 ) 박경가(朴慶家)와 종유(從遊)하였고 유고 2책이 있다. 순조 27년(1827년) 향년 72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가곡(佳谷) 강경동(康庚洞) 사좌(巳 坐)에 있다. 배위는 석복(錫福)의 딸인 은진송씨(恩津宋氏)이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고창오씨 세보(신사보) ●오선기(吳善基) 본관은 고창(高敞)이며 자는 경부(慶夫)이고 호는 한계(寒溪)이다. 통덕랑(通德 郞)을 지낸 익전(益烇)과 선무랑(宣務郞)을 지낸 익(翊)의 딸인 은진송씨(恩津 宋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인조 8년(1630년)에 태어났다. 어버이를 섬김에는 지 극(至極)한 효도(孝道)로써 하였고 부모님이 병환(病患)에 계실 때 꿩고기를 원 함에 꿩이 날아서 스스로 부엌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感應)한 것 이라고 하였다. 30세 되는 해에 부친이 그 이듬해 어머니의 상을 차례로 당하 였는데 죽을 마시고 여막(廬幕)에 거처하였다. 소싯적에 과거 공부를 매우 열 심히 하였으며 필법(筆法) 역시 훌륭하였다.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합격하였 으나 어버이 여읜 후에는 일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어려운 조카와 종제(從弟)를 기르고 교육시켰으며 , 후진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인간교육을 우선으로 가르치니 많은 학생이 찾아들 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항시 성리서(性理書), 공자가어(孔子家語) 등이 놓여 있었고, 근독잠(謹獨箴)을 지어 좌우에 걸어두고 깨우침을 삼았다. 종유(從遊 ) 했던 인물은 대군사부(大郡師傅)를 지낸 임곡(林谷) 임진부(林眞怤) 등 당대의 석학과 사귀였다. 숙종 29년(1703년) 1월 16일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 림면 귀원촌후(貴院村後) 술좌(戌座)이다. 배위는 직장(直長)을 지낸 대적(大適 ) 의 딸인 진주강씨(晋州姜氏)이다. 고령의 매림서원(梅林書院)과 영주의 남계사 (南溪祠) 등에 입향(立享)되었다. 저서로는 소학석의(小學釋義),ㆍ한계문집(寒溪 文集)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