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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4 - ●박원갑(朴元甲)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도원(桃源)이다. 통덕랑(通德 郞)을 지낸 정벽(廷璧)과 흠(欽)의 딸인 광주노씨(光州盧氏) 사이에서 명종 1 9 년(1564)년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송암(松庵) 김면(金沔)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 祐)와 화왕산(火旺山)에 입성하여 의병 활동을 하였다. 학문(學問)과 충효(忠孝 ) 를 겸비하였으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가 되었다. 광해군 10년(1618년) 6월 18일에 향년 55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우 곡면 도지리 학암산(鶴巖山) 선비부인(先妣夫人) 묘 좌측 간좌(艮坐)에 있다 . 배위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여겸(汝謙)의 딸인 팔계정씨(八溪鄭氏)이 다. 강정(江亭) 10경(十景)과 30여 수의 시가 실려 있는 도원유집(桃源遺集) 1 권이 전한다. 임난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배향(配享)되었다. 참고문헌 : 도원록(桃園錄), 화왕산성동고록(火旺山城同苦錄), 고령박씨 소윤공 파 세보(갑오보) ●박응형(朴應衡)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첨백(詹伯)이고 호는 남고(南皐)이다. 매헌(梅軒 ) 창선(昌先)과 응교(應敎)를 지낸 광윤(光胤)의 딸인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에 서 선조 38년(1605년) 2월 13일 태어났다. 학문이 정수(精粹)하고 행의(行誼 ) 가 고결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적에게 항복하자 두문자정(杜門自靖)하며, 그 심정을 담은 「충분시(忠憤詩)」를 지었다.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숭정력(崇禎曆)과 숭정연호(崇禎年號)를 쓰고 스스로 숭정처사(崇 禎處士)라 하였으며 숭정유민(崇禎遺民)으로 살았다. 조부 박정번(朴廷璠)의 절의정신(節義精神)을 계승(繼承), ⌈소학(小學)⌋을 통한 춘추대의(春秋大義 ) 실천, 오계(梧溪) 조정립(曺挺立)과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등 의리지향적 인물과의 교유를 통하여 초지일관(初志一貫) 의리에 입각한 삶을 살았다. 효종 9년(1658년) 11월 21일 졸(卒)하였고 묘는 경남 합천군 덕곡면 말곡(唜谷) 자 좌(子坐)에 있다. 문집으로는 시대를 마음 아파하고 그릇된 세도에 대하여 비 분강개(悲憤慷慨)하는 심정인 상시분세(傷時憤世)의 심정을 담고 있는 『남고 집(南皐集)』 6권이 있다. 배위는 참봉(參奉)을 지낸 매오(梅塢) 영후(榮后)의 딸 인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