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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1 - (休休堂)이라 한다. 음사(蔭仕)를 지낸 이동(異童)과 양주조씨(楊州趙氏) 사이에 서 성종 23년(1492년)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 지동(池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터 총명함이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났다(幼聰悟絶倫) 부모님의 상을 당해 서 지극한 효성으로 여묘(廬墓)살이를 독실하게 하였으며 문장(文章)과 행의(行 誼)가 세상에 드러나 장사랑(將仕郞)의 품계를 받았다. 중종 때 유일(遺逸)로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야계(倻溪) 송희규 (宋希奎),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 칠봉(七峯) 김희삼(金希參) 등과 도의지교 (道義之交)로 사귀었다. 문집은 2권인데 상권(上卷)은 임진병란(壬辰兵亂)에 소 실되었고 하권(下卷)만 1869년 목판본으로 서하일고(捿霞逸稿)가 전한다. 참고문헌 :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성주편(星州篇), 수성나씨세보(무인보) ●나학순(羅學洵) 본관은 수성(壽城)이며 초휘(初諱)는 학순(學淳)이었으나 학순(學洵)으로 개명 (改名)하였고 자는 희백(希伯), 호는 송오(松塢) 또는 인백당(忍百堂)이다. 생부(生父)는 진회(振繪)였으나 백부(伯父)인 진소(振素)에게 입양(入養)되었으 며 현종 15년(1674년) 태어났다. 공의 천품(天稟)이 훌륭하고 두드러지게 뛰어 나 청간당(聽澗堂) 이지완(李志完) 등 여러 석유(碩儒)들과 교유하여 더욱 강마 (講磨)에 힘쓰는 한편 현재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 낙동강이 내려 보이는 위치 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및 노론(老論) 핵심세력을 제 향(祭香)한 노강서원(老江書院)의 건립에 청간당(聽澗堂) 이지완(李志完)과 함 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노론에서 경종을 끌어내고 연잉군(延礽君 : 영조 ) 을 추대하려는 시나리오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으로 발각되어 몽와(夢 窩) 김창집(金昌集)이 사약(賜藥)을 받고 사사(賜死)되자 호상(護喪)하였다고 한 다. 영조 30년(1754년) 수(壽) 81세로 졸(卒)하였다. 송오유고(松塢遺稿) 1권이 전해져 온다. 묘는 고령군 다산면 벌지방(伐知坊) 새동(塞洞) 동화등(桐花嶝 ) 간좌(艮坐)에 있다. 배위는 익형(益亨)의 딸인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참고문헌 : 수성나씨 세보(무인보), 고령군지(1996년), 고령의 고문서 Ⅱ(노강서 원 소장 고문서) ●박돈(朴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