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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0 - 15일 유생(儒生)들이 기숙(寄宿)하면서 공부하던 재사(齋舍)에서 졸(卒)하니 향 년(享年) 46세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뒤편 부곡산(釜谷山) 자좌원(子 坐原)에 있으며 합폄(合窆)이다. 배위는 매헌(梅軒) 여계(汝契)의 딸인 양천최씨 (陽川崔氏)이다. 행장(行狀)은 외손(外孫) 현풍인(玄風人) 생원(生員) 곽수하(郭 壽夏)가 짓고 묘갈명(墓碣銘)은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 지었다. 참고문헌 : 황고집(黃臯集), 고양거사(高陽居士) 시언(時彦) 행장(行狀)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김증(金增) 본관은 일선(一善)이며 자는 천익(天益)이고 호는 창애(蒼厓)이다. 진사(進士 ) 를 지낸 계묵(啓默)과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기곤(基坤)의 딸인 의인(宜人) 순 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헌종 6년(1840년) 1월 8일 태어났다. 고종 1년 (1864년) 2단계 시험인 복시(覆試) 중에 진사공(進士公) 계묵(啓默)이 유학자 (儒學者)로서 자기의 임무로 여겨 라고 하여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배웠다. 1890년 태학(太學)에 추천하여 들어가 경서(經書)를 강론하였으며 사 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분석하였더니 성균관의 유명한 석학(碩學 ) 들이 공경하여 우러러 사모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893년 동학(東學)이 사 방에서 일어나 나라 안이 흔들리자 관학 유생(館學儒生)들과 함께 배척할 것에 대한 상소(上疏)를 올리고 부정척사문(扶正斥邪文) 즉 사악함을 물리치고 바르 고 옳은 것을 세운다는 글을 지어 군읍(郡邑)에 배포하고 마침내 호연히 귀향 (歸鄕)하여 산수(山水)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여생을 보내었다. 고종 4 년(1900년) 12월 11일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박곡(朴谷) 수거동(叟 居洞) 11대조고묘 좌록(左麓) 인좌(寅坐)에 있다. 초취는 의인(宜人) 여강이씨 (驪江李氏)이고 재취(再娶)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상례축사(喪禮祝辭) 질의 (質疑)에 관한 책 1권이 4책으로 유고(遺稿)로 전한다. 참고문헌 : 고령군지, 일선(선산)김씨 문충공파(文忠公派) 세보(기축보) ●나경문(羅景文) 본관은 수성(壽城)이며 자는 문숙(文叔)이고 호는 서하옹(捿霞翁) 또는 휴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