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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8 - 참고문헌 : 도동서원지(道東書院誌), 현풍곽씨 예곡공, 태허정 파보(임술보) 고령군지(1996년) ●김성하(金聲夏)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진옥(振玉)이고 호는 송강(松岡)이다. 처사(處士 ) 종수(宗修)와 재연(在淵)의 딸인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철종 14년(186 3 년) 9월 29일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에서 태어났다.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창번 (蒼樊) 이이건(李以鍵)을 따라가서 사장(詞章) 배우기를 청하여 드디어 창려문 (昌黎文)을 받아 읽어서 그 체제를 궁구(窮究)하였다. 고종 26년(1889년) 면우 (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이 고령군 쌍림면 반룡동 소재 미숭산방(美崇山房 ) 에 머물면서 학도(學徒)를 창솔(倡率)하고 있었는데 공의 나이 27세 때에 책갑 을 짊어지고 가서 스승으로부터 교화(敎化)를 받고 학문(學問)을 갈고 닦았으 며 충심(衷心)으로 기뻐하고 성심을 다하여 순종(順從)하여 ‘심리(心理)의 요지 (要旨)’를 듣고 알았다. 서자심근(四子心近)의 모든 서적을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은 생각에 잠겨서 묵묵히 속속들이 깊이 연구하여 침식(寢食)까지 잊기에 이 르렀다. 부모상(父母喪)에 있는 힘을 다하여 예를 다하였다. 상복의 기간이 끝 나자 난곡(蘭谷)에 서당을 짓고 날마다 정좌(靜坐)하여 서책(書冊)을 대하니 학 도(學徒)가 운집(雲集)하여 많이 성취(成就)시켰다.1909년 봄에 병이 나서 일어 나지 못하고 같은 해 8월 22일 졸(卒)하였는데 겨우 47세이었다. 원근사우(遠 近士友)들이 모두 슬퍼하고 탄식하였다. 1913년 9월 19일 고령군 쌍림면 월막 리 조곡산(鳥谷山) 술좌(戌座)에 장사지냈다. 공은 침착하고 의지가 강하였으며 깊이 삼가고 성실한 자질로서 각고(刻苦)의 사색(思索)을 하여 탁연(卓然)히 뜻 을 세워서 서책(書冊)에서 구하고 사우(士友)에게 묻고 무릇 천인성명이기지설 (天人性命理氣之說)과 삼천삼백(三千三百)의 예문(禮文)과 경사시소(經史詩騷 ) 에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으면 앞서 배운 것이 많고 학식이 넓은 사람과 오 랜 벗으로 들은 것이 많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풀고 기어코 그 본원(本 原)을 궁구(窮究)하고 그 요령을 얻고 그 지당한 것을 얻은 연후에야 그쳤다 . 공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으로부터 호학자(好學者)란 말을 들은 고 제(高弟)로서 실학중심(實學中心)의 독학자(篤學者)였다. 송강(松岡) 선생 사후 에 문인(門人)들과 추모인사(追慕人士)가 추모계(追慕契)인 경산계(敬山契)를 창설(創設)하여 묘갈수비(墓碣豎碑), 송강문집(松岡文集) 간행, 경산정(敬山亭 ) 건립 등을 하였으며 2003년 문집국역(文集國譯)과 유적비(遺蹟碑)를 건립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