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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 - 년) 3월 3일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지시로 전국 70곳의 의병 장 등 485명이 대구 공산성에서 모여서 왜군이 재침(再侵)할 경우 관군(官軍 ) 과 각 지역의 성씨를 대표하는 문중의 의병(義兵)들이 협조하여 결사항전(決死 抗戰)할 것을 다짐하였던 모임이 ‘1차 공산회맹(公山會盟)’이다. 고령출신으로 이 모임에 참가한 사람은 윤홍명(尹弘鳴)의 화암실기(花巖實記)와 이응벽(李應 壁)의 칠송당실기(七松堂實記)에 의하면 공을 비롯하여 유양좌(兪良佐), 김응성 (金應聖), 김성진(金聲振), 박원갑(朴元甲) 등으로 파악된다. 또한 정유재란(丁 酉再亂)이 일어나자 선조 30년(1597년) 7월 21일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 맞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창녕(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입성 (入城)하여 만반의 결전태세를 갖추고 방어했던 경상도 열읍의사(列邑義士 ) 559명의 성명·관직명 등이 실려 있는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에도 공 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공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당하여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창의(倡義)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국난극복(國難克服)에 많은 공을 세웠지만 선조 37년(1604년) 6월과 선조 38년(1605년) 4월 2차례에 걸친 임진왜란 전공자(戰功者)에 대한 공신(功臣) 녹훈(錄勳)에 공이 참여하지 못함은 당파적(黨派的) 논공행상(論功行賞)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우배선(禹 拜善)이 선조 33년(1600년) 김산군수(金山郡守)에 제수되자 개인이 저축한 재 물로 읍민(邑民)을 구휼(救恤)하는데 돌리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사간 원(司諫院)의 대신(㙜臣)들이 정사(政事)를 전적으로 하리(下吏)에게 맡겨 부역 (賦役)이 고르지 못하고 백성들의 유망사태(流亡事態)를 빚었다고 탄핵(彈劾)을 하자 서찰을 보내어 사간원(司諫院)의 대신(㙜臣)을 꾸짖고 우배선은 잘못이 없고 진실로 금릉의 백성을 구하고자 하였음을 옹호하였다 그후 대신(㙜臣)이 공을 보고는 부끄러워하면서 사죄해 마지않았으며 선조 36년(1603년) 다시 낙 안군수(樂安郡守)를 지냈다는 기록이 윤봉오(尹鳳五)가 찬(撰)한 월곡우공행장 (月谷禹公行狀)이 수록된 석문집(石門集)에 전한다. 공은 광해군 3년(1611년) 신해년 8월 14일 졸(卒)하니 향년 62세이었다. 묘는 선고 학곡공(鶴谷公) 묘 오른쪽 산등성이 내화성(內火城) 해좌(亥坐)에 있다. 배위는 호군(護軍)을 지낸 익(翼)의 딸인 숙부인(淑夫人) 진주유씨(晋州柳氏)이며 묘는 공과 합폄(合窆)이 다. 공은 사후(死後) 양난(兩難)의 전공(戰功)과 세상에 드러난 학행(學行)으로 인하여 지방 사림(士林)과 후손들의 공의(公議)를 거쳐 인조 14년(1636년)에 세워진 문연서원(文淵書院)을 비롯하여 모현정(慕賢亭), 학매정(鶴梅亭), 삼현사 (三賢祠), 임난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 등에 위패를 봉안하여 배 향하고 있다. 또한 1940년 후손들이 고령군 쌍림면 하거1리 학동에 공을 비롯 한 5현(五賢)의 사적이 기록된 양천최씨오현세적비(陽川崔氏五賢世蹟碑)를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