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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 -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지역의 의병(義兵)을 불러 모으는 역 할을 하였던 초모유사(招募有司) 형(兄) 정이례(鄭以禮)와 함께 김면(金沔) 장 군 휘하에서 창의(倡義)하였으며 고령대장(高靈代將)이었던 종형(從兄) 정상례 (鄭尙禮와 함께 무계전투(茂溪戰鬪)에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웠고 그 후 곽 재우 진영에서 각종 전투에 참전하여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장사랑 (將仕郞)의 품계를 받았다. 궁중의 어류, 육류, 소금, 땔나무, 횃불(炬火 : 거 화) 등의 일을 관장하였던 사재감(司宰監)의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대구 임란 호국충의단(壬亂護國忠義壇)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배위는 서흥김씨(瑞興金 氏)이며 이조참판(吏曹參判) 김형열(金馨悅),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후예이다. 몰년(沒年)은 미상(未詳)이며 묘소는 현서(縣西) 가서리(加西里) 오망 곡(五望谷) 중등(中嶝) 간좌(艮坐) 선비(先妣) 묘소 아래에 있다. 묘갈명(墓碣 銘)은 성산인(星山人) 이헌주(李憲柱)가 지었다. 부인의 묘소는 부군의 묘 왼쪽 에 있다. 참고문헌 : 진양정씨 족보(을유보), 농산세헌(農山世獻), 용사응모록(龍蛇應募 錄) ●최여설(崔汝契)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순보(舜輔)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호군(護軍 ) 을 지낸 학곡(鶴谷) 원(源)과 현감(縣監)을 지낸 홍(洪)의 딸인 숙부인(淑夫人 ) 남평문씨(南平文氏) 사이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명종 6년(1551년) 신해년 1 0 월 8일 고령군 쌍림면 하거1리 학동(鶴洞)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부모(父母 ) 의 상사(喪事)를 당(當)하여 몹시 야윌 만큼 부모(父母)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 고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어려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인 낙천(洛 川) 배신(裵紳)을 스승으로 삼았으나 후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족보 기록에 의하면 선조 때에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로서 학식(學識 ) 과 인품(人品)을 갖추고 있으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 이들을 과거시험 없이 발탁(拔擢)하는 인재등용 방법인 유일(遺逸)에 의하여 장사랑(將仕郞) 훈 도(訓導)에 제수(除授)되었다. 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에 의하면 임진란(壬辰亂 ) 을 당하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진영(陣營)의 창의(倡義)에 동참하여 각종 전투에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웠다. 양천최씨 임술보(壬戌譜 : 1982년 ) 의 기록에 의하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게 글로써 보기를 청하면서 임 진란 극복을 위한 많은 계책(計策)을 제시하여 도왔다고 한다. 선조 29년(15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