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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 - 본관은 진양(晋陽)이며 자는 경보(敬甫)이다. 아버지 정하(鄭厦)와 경주설씨(慶 州薛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양정씨 세보에 생년(生年)이 미상이나 무과(武科)에 급제한 종형제인 정상례(鄭尙禮)의 생년이 『기축4월일증광용호방 목(己丑四月日增廣龍虎榜目)』에 명종 13년(1558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1558년 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근거는 영조 47년(1771년) 곽 원갑(郭元甲)이 지은 망우선생급창의록(忘憂先生及倡義錄)중 용사응모록(龍蛇 應募錄)에 정이례(鄭以禮)에 관하여 “ 자는 경보(敬甫) 본관은 진양(晋陽) 정유 례(鄭有禮)의 종제(從弟)로 고령 지내(池內)에 거주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 문이다. 송암선생유고권지이松菴先生遺稿卷之二)의 임진창의시동고록(壬辰倡義 時同苦錄)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 거주 김응성(金應聖)과 함께 고 령지역의 의병(義兵)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는 초모유사(招募有司)로 김면(金 沔) 장군 휘하에서 창의(倡義)하였으나 후에 동생 정준례(鄭遵禮)와 곽재우 진 영에서 각종 전투에 참전하여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대구 임란호국 충의단(壬亂護國忠義壇)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최근 송암선생유고권지이松 菴先生遺稿卷之二)의 보유(補遺)의 기록에 있는 김면(金沔) 장군이 돌아가시자 공의 남긴 만장(挽章)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每仍道義接芳鄰(매잉도의접방린) 늘 도의(道義)로 사귀던 좋은 이웃이었는데 何事公家壽欠仁(하사공가수흠인) 무슨 일로 공의 가문은 어질면서도 수명은 짧은가 師友淵源無處問(사우연원무처간) 스승과 벗 사이에 연원을 물을 데가 없으니 哀詞今日倍傷神(애사금일배상신) 애사(哀詞)를 짓는 오늘 내 마음 더욱 아프다오 본 만장(挽章)을 통하여 임진왜란 당시 진양정씨 문중과 고령김씨 문중은 고령 지역의 대표적인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서 지역에서 명망이 높았던 가문간에 세교(世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면 장군이 1541년생이므로 두 분 사이에 는 스승과 제자사이로 추정되며 스승을 기리는 제자의 애통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진양인(晋陽人)으로 함양(咸陽)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義兵將) 정경 운(鄭慶雲)이 지은 고대일록(孤臺日錄) 제3권 신축(1601년) 10월 4일 무진(戊 辰) 기록을 살펴보면 공의 졸년월일(卒年月日)이 기록되어 있어 아래에서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