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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 - (假將) 김준민(金俊民) 등과 함께 2,8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을 치고 군사 를 6, 7개소에 매복(埋伏)시켜 무계(茂溪)에서 성주로 향하는 4백여 명의 적보 급부대(敵補給部隊)를 포착(捕捉)하고 포위공격(包圍攻擊)하여 짐 싣는 말 백 50여 필, 해와 달이 그려진 큰 기 3개, 그리고 철환(鐵丸)과 화약 등속(等屬)이 매우 많은 군수품(軍需品)을 노획(鹵獲)하는 큰 전과(戰果)를 올렸다. 동년 9월 초에는 초계의병(草溪義兵)을 이끌고 고령현 안림(安林)에 주둔하였다가 15일 성주로 진출하여 매복작전(埋伏作戰)으로 왜군을 유인, 격파하였으나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동년 10월 삼가 의병장(三嘉 義兵將) 윤탁(尹鐸), 의령 가 장(宜寧 假將) 곽재우(郭再祐), 초계 가장(草溪 假將) 정언충(鄭彦忠) 등과 함께 외원군(外援軍)으로 진주(晋州) 동쪽 방면을 지켜 1592년 10월 5일부터 10월 10일까지 있었던 제1차 진주성전투(晋州城戰鬪)에서 승첩(勝捷)을 거둘 수 있 었다. 같은 해 12월 7일부터 12월 14일까지 있었던 제3차 성주성전투(星州城 戰鬪)에서 공은 김면(金沔) 도대장(都大將) 지휘하(指揮下)에 정인홍(鄭仁弘) 대 장(大將), 전라좌의병장(全羅左義兵將) 최경회(崔慶會), 전라우의병장(全羅右義 兵將) 임계영(任啓英) 등과 함께 5천명의 군사로서 협공(挾攻)하여 익년(翌年 ) 1월 15일 성주성(星州城) 탈환(奪還)에 성공(成功)하였으며 이후 남해안(南海 岸) 지역으로 남하(南下)하여 패주(敗走)하는 적을 쫒아 선산(善山)지역까지 진 출하여 분전(奮戰)하였다. 이러한 전공(戰功)으로 선조 27년(1594년) 진해현감 (鎭海縣監)을 거쳐 선조 28년(1595년) 정월 전후(前後)의 공로(功勞)로 봉정대 부(奉正大夫) 수(守)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除授)되었다가 내암(來庵) 정인 홍(鄭仁弘)의 천거(薦擧)로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역임(歷任)하였다. 선조 30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중군장(中軍將)으로 울주(蔚州) 증성 (甑城) 전투에 참전하여 세운 전공(戰功)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 翼)이 천거(薦擧)하여 동년 12월 남원도호부사(南原都護府使)에 제수되었고 선 조 31년(1598년) 익산군수(益山郡守)에 배수(拜受)되었으며 선조38년(1605년 ) 전공(戰功)으로 선무원종이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광해 군 원년(1609년)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을 맡아 궁중을 숙위(宿衛)하다가 광 해 3년(1611년) 사직(辭職)하였다. 광해군 7년(1615년) 12월 29일 향년 62세 로 졸(卒)하였다. 묘소는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장방동) 선영 아래 해좌원(亥坐 原)에 있다. 합천 임란창의사(壬亂彰義祠)에 위패가 봉안(奉安)되어 매년 5월 10일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으며 그밖에 서생포(西生浦) 창표당(蒼表堂)과 울 산(蔚山) 충의사(忠義祠)에 도 배향(配享)되었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부사동래정공묘지명(府使東萊鄭公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