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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 - ●정언충(鄭彦忠)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신숙(藎叔)이다.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증직(贈職 ) 된 아버지 정항(鄭恒)과 선무랑(宣武郞) 북부참봉(北府參奉)을 지낸 류광한(柳 匡漢)의 딸 정부인(貞夫人) 문화류씨(文化柳氏)사이에서 명종 6년(1554년) 6월 5일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에서 태어났다.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門 人)이다. 공은 어려서 외숙(外叔)인 통정대부(通政大夫) 류태수(柳台壽)에 의지 하여 일찍이 말 타는 일과 활 쏘는 일을 익히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들을 많이 탐독(耽讀)하였다. 선조 15년(1582년) 임오(壬午) 별시(別試)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조 18년(1585년) 봄에 서생포(西生浦) 만호진성(萬戶鎭城)을 지키 는 수군만호(水軍萬戶)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이듬해 벼슬을 내어 놓고 고향으 로 돌아왔다. 선조 25년(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홍(鄭仁弘)이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초안(草案)하여 의병(義兵)을 모집하니 의병진(義兵陣)에 합류(合流)하여 정인홍(鄭仁弘) 대장(大將)의 천거(薦擧)로 초계(草溪) 가장(假 將)으로 임명되었다. 정인홍(鄭仁弘) 대장(大將)의 명령으로 5월 하순에 초계의 병(草溪義兵)을 이끌고 가리현(加利縣) 무계진(茂溪津) 현재 고령군 성산면 무 계리 인근으로 이동하여 6월 5일 왜적(倭敵)의 병참기지(兵站基地)가 된 무계 진(茂溪津) 보루(堡壘) 공격작전(攻擊作戰)인 제1차 무계전투(茂溪戰鬪)에 참전 (參戰) 중 공의 초계군(草溪軍)은 무계진(茂溪津) 상류쪽인 노다촌(老多村) 즉 현재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 노강서원(老江書院) 근처에 매복(埋伏)하여 왜군의 지원병력의 접근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아 정인홍(鄭仁弘) 대장(大將)과 손인갑 (孫仁甲) 중랑장(中郞將)의 적진공격(敵陣攻擊)을 엄호(掩護)하는 역할을 성공 리에 완수하여 100여명의 사상자(死傷者)가 발생하는 등 제1차 무계전투(茂溪 戰鬪)가 대승(大勝)을 거둘 수 있도록 도왔다. 6월 중순경에는 초계(草溪) 의병 장(義兵將) 전치원(全致遠)ㆍ이대기(李大期)와 함께 낙동강변에 목책(木柵 : 울 짱)을 설치하고 매복(埋伏)하던 중 19일 새벽 왜선 5척이 목책에 걸린 것을 공 격하여 많은 적을 살상(殺傷)하였다. 6월 22일에는 왜선 12척이 고령쪽에서 내 려오다가 목책(木柵)에 걸린 것을 정인홍(鄭仁弘) 대장(大將)에게 고(告)하여 지 원을 요청하는 한편 전치원(全致遠)ㆍ이대기(李大期) 의병장(義兵長)들과 협공 (挾攻)하자 적들은 배에 실은 약탈품(掠奪品)을 강물에 던지고 달아나는 것을 4척은 완전히 잡아 물에 빠져 죽은 자 외에도 참수급(斬數級) 8급을 올렸다. 7 월 9일 정인홍(鄭仁弘) 대장(大將)은 낙동강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사원동(蛇 院洞) 안언(安彦) 즉 지금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 길 옆에 공을 비롯하여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