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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 - 先鋒) 하종해(河宗海)를 시켜 군사를 끌고 오른쪽 재로 해서 곧장 무계역(茂溪 驛)에 이르게 하고, 고령대장(高靈代將) 정상례(鄭尙禮)를 시켜 왼쪽 재의 대로 (大路)로 해서 진군하게 하였다. 또 전 군수 이언성(李彦誠)과 성정국(成定國 ) 으로 하여금 성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언역(安彦驛)의 길에 매복하여 성주(星 州)에서 후원해 오는 왜적을 끊게 하고, 정언충(鄭彦忠)을 시켜 노다촌(老多村 ) 에 매복케 하여 강을 내려가는 왜적을 끊게 하였으며, 정인홍(鄭仁弘)은 손인 갑(孫仁甲)과 더불어 중위군(中衛軍)을 거느리고 곧장 왜적의 군막을 짓이겨 대었다. 왜적이 약탈한 재보(財寶)를 무계(茂溪)의 역사(驛舍)에 가뜩 쌓고 횃 불 하나로 태워버리고 소와 말을 빼앗았다. ” 공이 제1차 무계전투에 참가한 것은 남의 책임(責任)을 대신(代身)하여 출전(出 戰)한 장수(將帥)를 대장(代將)이라고 칭(稱)하므로 유고(有故)가 있었던 고령지 역을 담당한 장수(將帥)를 대신하여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운 것으로 파악 된다. 이 전투에서 적장(敵將) 촌상경친(村上景親)에게 중상(重傷)을 입히는 등 140여 명을 살상(殺傷)하고 보급물자(補給物資)와 약탈품(掠奪品)을 불태우는 전과(戰果)를 올린 것은 면밀한 작전계획에 의한 의병(義兵)으로서는 최초의 향토방위적(鄕土防衛的)인 차원을 넘어선 대규모의 능동적(能動的)인 공세(攻 勢)를 취한 작전으로 전세(戰勢)를 역전(逆戰)시키는 계기가 되어 침략군에게 의병(義兵)이 있음을 알려준 전투(戰鬪)로 높이 평가해야 할 의의(意義)가 있다 고 하겠다, 월담(月潭) 정사현(鄭師賢)의 직계후손중 임진난(壬辰亂)에 창의(倡 義) 거병(擧兵)한 분은 일문(一門)에 네 분이 있어 국난극복(國難克服)을 위하 여 진충보국(盡忠報國)한 명문가(名門家)로 명성(名聲)을 이어가고 있다. 장남 정서(鄭序)는 아들과 조카들에게 송암(松庵) 김면(金沔) 휘하에서 창의(倡義)할 것을 독려하였고 손자 유례(有禮)는 전공(戰功)으로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 고, 손자 이례(以禮)는 김면(金沔) 휘하의 초모유사(招募有司)로서 활약했고, 손 자 준례(遵禮)는 김면(金沔) 휘하로 지례(知禮)전투에 참전하였고, 손자 상례(相 禮)는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휘하의 고령대장(高靈代將)으로 무계전투(茂 溪戰鬪)에서 전공(戰功)을 세워 만호(萬戶)를 지냈으며 선조 38년(1605년) 선 무원종삼등공신 (宣武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임란호국충의단(壬亂 護國忠義壇)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공의 몰년(沒年)은 미상이며 묘는 시례 동(詩禮洞) 임좌(壬坐)에 있다. 배위는 내금위(內禁衛)를 지낸 이성(李誠)의 딸 로 성산이씨(星山李氏)이며 묘는 부군의 묘 아래에 있다. 참고문헌 : 진양정씨 족보(을유보), 기축4월일증광용호방목(己丑四月日增廣龍虎 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