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page

- 193 - 모신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회연서원(檜淵書院) 향현사(鄕賢祠)와 고 령군 성산면 고탄리 봉양원사(鳳陽院祠)에 배향되어 있다. 후손들이 공의 유덕 (遺德)을 추모하기 위하여 철종 5년(1854년) 고령군 성산면 삼대리에 추원재 (追遠齋)를 세웠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선조 37년(1604년) 6 월과 선조 38년(1605년) 4월 논공행상(論功行賞)시 공의 전공(戰功)이 누락(漏 落)되어 현양(顯揚)되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수사항절(守死抗節)한 광산이 씨(光山李氏) 열녀(烈女)의 미담(美談)를 소개하고자 한다. 광산이씨(光山李氏 )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의 딸로 나이 19세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피난을 가 다가 왜군을 만나게 되었다. 왜군이 자신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가려고 하자 딸 은 절개(節槪)를 지키기 위해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칼을 꺼내어 왜군에게 잡 혔던 자신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그녀의 단호한 행동에 겁을 먹은 왜군은 도망 치듯 물러갔다. 하지만 잘린 손목의 상처로 인해 그녀는 죽으면서 왜군이 잡은 더러운 손목은 함께 묻어주지 말 것을 유언(遺言)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수사 항절(守死抗節)한 공의 딸 열녀(烈女) 광산이씨의 묘소는 고령군(高靈郡) 성산 면(星山面) 고탄리(高呑里) 재궁동(齋宮洞) 선영(先塋) 좌록(左麓)에 있다. 주졸 (州倅) 윤형각(尹衡覺)은 그녀의 제사에서 다음과 같은 제문을 지어 그 행동을 기렸다. “죽음으로 지킨 절개 그 남긴 향기 아직 사라지지 않았도다. 곧은 품 성을 가히 숭상할 만하여 공경스럽게 제사를 드리오니 강림하여 흠향하소서.” 참고문헌 : 난중잡록일(亂中雜錄一), 산서지(山西誌), 합천 임란사, 송암실기 (松庵實紀), 예곡문집(禮谷文集),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임진전란사(壬辰戰亂史), 광산이씨 한림공 영남파 신묘보(辛卯譜 : 2011년) ●정극례(鄭克禮) 본관은 진양(晋陽)이며 자는 창서(昌瑞)이고 호는 죽포(竹圃)이다. 만호(萬戶 ) 를 지낸 아버지 정응(鄭應)과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세운 전공(戰功)으로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에 증직(贈職)된 영기(永基)의 딸인 성산전씨(星山全 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명종 4년(1549년) 고령군 대가야읍 월기리에서 태어났 다. 공은 선향지(先鄕地) 고령(高靈) 월기(月磯)를 떠나 달성군 다사면 죽곡 1 리에 복거(卜居)한 진양정씨(晋陽鄭氏) 죽곡(竹谷)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참고 로 죽곡(竹谷) 동명 유래를 살펴보면 죽곡(竹谷)은 낙동강을 끼고 금호강과 합 류하는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신라시대 가락국의 침략을 막기 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