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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 - 어져 임진왜란(壬辰倭亂) 의병사(義兵史)’에 길이 빛나는 ‘안언(安彦)전투’가 바 로 그것이다. 왜적은 낙동강(洛東江)의 수로(水路)를 확보하기 위하여 무계(茂 溪)에도 별대(別隊)를 파견하여 주둔(駐屯)하였으며 뱀처럼 꿈틀대는 야산 자락 이 10여리나 이어져 일명 ‘사원동(蛇院洞)’이라 불리는 이곳은 성주와 무계 사 이의 전선(戰線)에 보내는 물자수송차(物資輸送次) 보급품(補給品)을 운반하는 왜군들이 자주 출몰(出沒)했던 곳이며 지금 낙동강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현재 성주군(星州郡) 용암면(龍岩面) 용정리(龍亭里) 일대를 말한다. 조경남(趙慶南 ) 이 쓴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임진년 상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7월 9 일 기록을 인용하면 “합천(陜川)의 의병대장(義兵大將) 정인홍(鄭仁弘)이 가장(假將) 김준민(金俊民 ) 과 더불어 군사 2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안언(安彦)의 적을 공격하여 다 섬멸 (殲滅)했다. 이때 김준민은 처음 와서 재주를 시험해 본 바 없었고, 성주(星州 ) 가리현(加利縣) 이홍우(李弘宇)의 군사는 이부산(伊傅山)에 있었으며, 고령(高 靈)ㆍ합천의 군사는 가천(伽川 : 성주 서면의 마을)에 있고 문여(文勵)의 군사 도 역시 성주에 있어 모두 정인홍의 지휘를 받았다” 이 전투에서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휘하의 합천(陜川), 초계(草溪), 성주 (星州), 고령(高靈)의 군사들이 활동하여 왜적 400여명을 섬멸(殲滅)하는 대전 과(大戰果)를 올렸으며 짐실은 말 150여 필, 해와 달이 그려진 큰 기 3개, 그 리고 철환(鐵丸)과 화약(火藥) 등 다수를 노획.(虜獲)하였다. 전사(戰史)는 ‘僵 屍相續(강시상속) 流血盈野(유혈영야) 즉 죽은 시체가 서로 잇대고 흐르는 피 가 들판에 가득했다’며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공이 사원동(蛇院洞) 안언 전투(安彦戰鬪)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예곡(禮谷) 곽율(郭)이 지은 예곡선생문집(禮谷先生文集)에 있는 잡저(雜著) 팔계일기(八溪日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진(壬辰) 1592년 선조 25년 9월 12일 가리(加利 : 현재 고령군 성산면)의 이계용(李季容 : 이홍우의 자)의 군병은 12일 밤에 무계(茂溪)의 왜막(倭幕)에 불을 지르니 적이 삼동동(三同洞) 산상(山上)에 진(陳)치거늘 강양(江陽 : 현재 합천)과 고양군(高陽軍)이 달려가 돕는다는 전통(傳通)이다.” 팔계일기(八溪日記)를 통해서 공이 수차례 가리(加利)와 인접(隣接)한 무계전투 (茂溪戰鬪)에 야음(夜陰)을 이용한 기습공격(奇襲攻擊)으로 전과(戰果)를 올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은 선조 27년(1594년) 10월 15일 향년 60세로 하세 (下世)하여 묘소는 고령군 성산면 삼대동(三大洞) 후(後) 곤좌(坤坐)에 있다. 공 의 행장(行狀)은 이조판서를 지낸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이 쓰고 묘도비명 (墓道碑銘)은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찬하였다. 공은 한강(寒岡) 정구(鄭逑)를